김성수 3

김성수 2023.10.28 조회: 405077

 

삼천리 제10호  

 

1930년 11월 01일  

 

 

朝鮮 大財閥 總解剖(一), 金性洙系의 500萬圓, 事業體系=京城紡績, 京城商工, 海東銀行, 東亞日報, 中央學校  

 

 

朝鮮 大財閥 總解剖

 

 

柳光烈

 

 

 

朝鮮에서 자못 近代式으로 事業을 버리인 財産家가 잇다면 누구든지 人村 金性洙氏를 첫 손에 곱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學校로 新聞社로 紡績會社로 여러 가지 事業에 손을 내밀어 朝鮮經濟界에 한 王國을 세운 金性洙氏는 全南 扶安 茁浦의 한 地主의 아들이다. 封建的 春睡가 方濃한 中 더욱 急激한 外來資本이 들어와서 朝鮮의 産業革命을 밀고 나갈 때에 모든 封建的 蓄積인 地主가 漠然히 그 所措를 알지 못하고 枕을 列하야 넘어지면서 그 蓄積한 財産의 正比例로 蓄妾과 遊蕩을 일삼을 때에 微弱하나마 外來資本家와 相對하야 一矢를 應酬하는 것이 金氏外 幾人뿐이다. 氏는 地主의 아들로 오래 家庭에서 舊學에 힘썻고 느께야 芨을 負하고 東京에 渡하야 早稻田學窓에 螢雪의 功을 싸흐니 當時 20內外의 多感하든 氏는 滿目荒凉한 故國을 돌아보며 時時로 深慮에 잠기고 感情에 激하엿섯다. 學業을 마치고 그의 平生莫逆인 安鎭禹氏와 歸國하니 一妙小한 25,6歲의 靑年이며 歸國하자 곳 着手한 것이 敎育界이니 그것이 現在 中央學校이다.

 

 

 

中央高等普通學校

 

 

兩氏가 京城에 돌아오자 곳 自由學校를 經營키로 하여 그 設立願을 當時 尖頭總督 寺內氏에게 提出하엿스나 그때는 日韓倂合된지 얼마 안되여 私學에 대하야는 警戒할 때이며 몃개 잇는 私學도 財政難 其他로 一種 受難時代이엿다. 學校認可가 容易히 되지 못한 것을 본 兩氏는 그때 몹시 財政難에 빠지엇던 中央學校를 引繼하게 되엿다. 中央學校는 前畿潮學校 後身이니 一時 熱血志士의 손으로 校運이 隆盛하엿스나 一陣霜風에 萬華가 俱하듯이 或은 亡命 或은 慴伏하고 經營이 困難케 되엿섯다. 兩氏가 이를 引繼는 하엿스나 元來 靑年이라 巨大한 財政을 投함에는 父兄의 承諾을 엇지 아느면 안되게 되엿다.

 

 

守成에 長한 父兄이 뉘-巨萬의 大金을 投하야 不生産的 學校를 經營하는데 질겁게 許諾하리요. 이에 金氏는 몃칠 조르다 못하야 畢竟 最後的으로<24> 身命을 睹하며 待命하엿다. 븨인房에 門을 疊疊히 닷고 몃칠을 굶으며 自殺할 뜻을 보이엿다. 그의 父親은 體面上으로라도 가만히 잇서 버틔여 보앗스나 慈愛깁흔 그 母親은 『미음』그릇을 들고 감긴 門고리에 매달리여 『성수야-』를 連呼하며 盡日 痛哭하야 집안은 亂家가 되엿섯다 한다.

 

 

이리하야 承諾을 어든 氏는 松林이 鬱蒼한 現桂山에 校舍建築을 計劃하고 또 父親 압헤 가서 數日을 痛諫하야 8萬圓의 巨額을 어더 新築하엿다. 以來 春風秋雨 十餘星霜에 數千의 英俊을 社會에 보내고 7,8百의 健兒가 校庭에 뛰게 되엿다.

이 靑年敎育家 金氏가 經營하는 中央學校에는 海外에서 돌아온 敎育家들이 만이 모히여 一時는 新思想 鼓吹의 叢林이 되엿섯다. 年前에 30萬圓의 財團法人을 만들어 萬年不敗의 基礎가 完成하엿다.

 

 

 

東亞日報社

 

 

東亞日報社는 株式會社이라. 氏의 單獨事業이라 할 수는 업스나 現在 70萬圓 株式會社에 그 株數過半이 金氏의 一門 또는 姻戚, 同志의 所有이니 氏의 事業이라 하여도 過言이 아니다. 己未年 三一運動이 朝鮮의 山河를 震憾한 後 10年緎日하엿던 朝鮮의 言論界는 길고 긴 冬眠期를 지나 一陽來復의 春光을 보게 되엿다. 言論界의 元老 枊瑾, 新進 李相協, 靑年政論家로 名聲놉흔 張德秀氏 等이 모히여 發刊하엿스나 元來 數字的 採算에 어두운 老士書生의 일이라 一年有餘에 10餘萬圓이 들어가고 經營은 困難하게 되엿다. 돈을 대이다가 지치인 金氏는 家用金 幾千圓을 들고 와서 『여러분! 이 돈을 내가 家用쓰는 마지막 돈을 털러 왓스니 이것을 다쓰면 나는 어쩔수 업소』라고 最後의 말까지 하엿섯다고 한다.

 

 

이때에 그의 莫逆인 安鎭禹氏는 己未事件으로 服役을 마지고 出獄하자 이 經營困難한 東亞日報社를 復興키 爲하야 東奔西走하야 畢竟 株式會社를 完成하엿다. 이리하야 幾多의 劫運을 지나며 奮鬪한 結果 이제는 光化門通에 한 4層社屋을 建築하고 朝鮮言論界의 一大權威가 되엿다. 10年을 자란 이 新聞은 風雨을 지나며 힘잇게 그 步武를 옴기인다.

 

 

 

京城紡績會社」

 

 

朝鮮人의 衣服次로 年 5千萬圓이 海外로 流出한다. 이에 着眠한 金氏는 大正 8年에 紡織會社를 發起하야 第1回 拂込 25萬圓으로 事業을 始作하엿다. 그러나 이것도 這間에 어떠한 事情으로 當時 企業의 責任을 마탓던 李康賢氏는 븨인 손을 털어 쥐게 되엿다. 이에 金氏는 다시 第2回 拂込을 劃策하야 50萬圓으로 現在는 年産額 220萬圓으로 氷登浦 넓은 별판에 濛濛히 그 工場煙氣를 吐하고 男女職工 450名이 일을 한다. 그 製品은 全朝鮮布木商에게 퍼지엿스며 6種의 廣木은 朝鮮人의 衣服次로 需用된다. 不遠에 第3回 拂込을 하야 明年부터는 年額 500萬圓의 産品을 내여 朝鮮總供給量이 10分의 一을 占領하리라 한다. 同時에 全朝鮮에 朝鮮人經營의 紡績會社는 이 會社 하나뿐임을 附記한다. 만일 金氏가튼 朝鮮人 財産家 10人이 잇섯드랴면 衣服次로는 朝鮮人이 外來品을 안쓰게 되엿쓸가

 

 

海東銀行

 

 

이 銀行은 원래 貴族 尹德榮 外 諸氏가 創立 經營하엿스나 中途에 經營困難에 빠진 것을 金氏의 令弟 金秊洙氏가 마튼 것이니 資本金 100萬圓의<25> 株式會社이다. 一時 失하엿던 信用도 漸次恢復하고 現在는 文尙宇氏가 釆配를 쥐고 堅實하게 經營하야 昨年도에는 6分의 配當을 하엿다 한다. 不幾年에 朝鮮財界에 相當한 地盤을 占할 것이다.

 

 

京城商工會社

 

이것은 並木町에 잇서 織紐 등을 經營하던 것을 金秊洙氏가 마타 經營케 되여 고무신 製造와 貿易을 經營하게 되엿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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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제7권 제8호  

 

1935년 09월 01일  

 

 

百萬長者의 百萬圓觀

 

滄浪客

 

 

작고 쓰고 십다는 김성수

 

 

8월 수무닷샛날 오후의 쩔쩔끌는 해볏은 서울 桂洞 막바지 金性洙씨 洋舘住宅의 응접실을 녹일 듯이 빗최는데 나는 화초 욱어진 정원으로부터 흘너들이는 매암소리를 드러가면서 벽에 걸닌 山水畵를 처다 보왓다.

 

 

언제 보아도 방안을 이러틋 質素簡潔하게 차렷슴은 이 집 어룬의 氣風을 나타냄인 듯 조곰도 百萬長者란 어리어리한 대저택에서 늣겨지는 압박감이라고 업서서 우리들 평민으로도 마음노코 출입할 수 잇는 듯 유쾌하엿다.

 

 

조곰 뒤에 명함 전하려 드러간 계집하인의 뒤를 따라 仁村 金成洙씨가 우스면서 나타난다. 저쪽 방에서 서도 인저끼 잇슬제는 아마 나보다 몬져 차저온 先客이 잇는 듯 하엿스나 나를 몬저 맛나줌은 레포타의 時間 존중을 이해하심인가.

내가 氏를 처음 맛나든 10여 년 전이나 지금 보는 오늘이거나 氏는 언제든지 대모테 안경에 국다란 北베周依를 입엇섯다. 錦衣를 입는적 업는 이 백만장자, 금테단경을 써 본적 업는 이 백만장자, 이분의 「黃金哲學」은 엇더하엿든가, 「人生觀」또한 엇더하엿든가, 나는 第一矢를 발하여 보앗다.

 

 

나, 「이 세상에선 돈이 제일임니까, 돈우에 더 귀한 것 업고 더 갑가는 것 업다고 보심니까」

 

金, 「천만에요, 돈이 무에관데요, 돈가치 천한 것이 업고 돈가치 더러운 것이 업는데 무엇하자고 이 세상에서 돈이 제일 간다고 하겟서요 나는 아직 돈이 제일 간다고 생각하여 본적이 업서요, 돈 우에 인정도 잇고 의리도 잇고.....」

 

나, 「그러나 돈 아니면 선생인들 엇더케 은행을 경영하고, 학교와, 신문사와, 공장을 경영하겟서요, 천하에는 뜻이 백두산 가치 놉흔 이가 데글 데글 굴너다니지만 돈 한가지가 업스니까, 빈주먹만 부르들고 청천하늘을 처다보며 한숨만 짓는 이 엇더케 만은데요」

 

金, 「그야 그러치요 돈이란 무엇임니까, 그 자체는 조히쪽이요, 구리쇠요, 금은鑛物일 뿐 깨긋한 물건도 못되건만, 다만 이 세상에서는 사라가재도 압서는 것이 돈, 무슨 사업을 하재로 역시 돈이 압장을 서야 하게 꾸미여 젓스니까, 拜金宗도 생기고, 황금만능론자도 생 기나봅데만은 내 자신은 일즉 拜金宗의 심경을 가져본 때가 업섯슴니다. 돈 잇스면 일하고 돈 업스면 말뿐이지, 돈 때문에 노예되려고 생각을 가지고 잇지는 안어요,

 

 

黃金을 엇더케 보시는가

 

 

나, 「일전에 미국서 온 신문을 보면 록펠라는 제재산 40억 만원 중 2억 3천 만원을 사회사업에 내노으면서 聲明書를 발표하엿는데 이 세계적 大富豪의 黃金觀이란 敬聽할 만합데다그려 

 

金, 「엇더케요」

 

나, 「무에라고 하엿는가 하면 내가 가진 40억만원을 나는 내 돈이라고 생각지 안노라, 다만 내 수중에 보관되어 잇는 여러분의 돈이라고 보노라 하고 또 요행 조흔 운명을 태가지고 낫기 까닭에 내가 맛터두게 되엇슬 뿐」이라고 첫곡지를 말햇습데다.

 

金, 「그말이 올치요, 실상 맛터잇슬 뿐이지, 제것이 다하고 고집할 맛이야 잇서야지요 돈 관리자라는 그 黃金觀에는 나도 共鳴함니다.

 

 

나, 네 그러고 그 뒤를 게속하엿는데, 「그럼 이 돈을 내가 마타가지고 잇는 것이 낭비를 피하고 압흐로 더 그 돈을 뿔굴 수 잇스니까, 내 수중에 의연히 두어야 올타고 보기에 남저지 30 몃 억만원은 아직 내어 노치 못하겟노라 하엿고, 또 今后 어느 시기에 이 돈을 내어 놋는 때문에 세상이 더 밝어질 기회가 온다면 저보다 나온 딴 사람이 그 돈을 마터 관리하게 되어도 무방하다구요.

 

金, 「글세오, 그러케 보는 것이 올켓지요, 그만한 자신이 업서야 엇더케 돈을 지니고 가겟습니까, 그리고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요, 세상사람은 흔히 부자라면 바버요, 멍텅구리로 아는 경향이 잇지만은, 남들이 버을지 못하는 大金을 모아 쥐는 그 當者에게는 무엔가-例하면 智力이나 體力에 잇서서 무엇인가 뛰어난 점이 잇는 법임니다. 그러킬래 몃 10 만명중 오직 그 사람에게만 돈이 가지고, 몃 100 만명중 오직 그 한사람에게만 부자소리가 가지는 것이 안여요 또 10만명이나 100만명 속에서 뽑히여지는 그 부자에게는 남이 모르는 고심이 잇담니다. 결단코, 우연히 하늘에서 금덩이가 뚝떠러저 부자가 되여지는 것은 아니지요.

 

 

나, 「네 알겟서요, 그런데 선생은 오늘까지 얼마나한 돈을 쓰섯서요, 얼마나한 돈을 자긔 손으로 만저보고 또 지출하여 보섯서요,」

이 말에 氏는 呵呵대소하면서 손을 헤헤 둘너 입을 막으란 표정을 한다.

나, 「엇재서 말슴 안하세요, 50만원임니까, 100만원임니까」

金, 「그런말 내가 엇더케 대답해요. 글세 돈 쓴 제 자랑갓해서」

나, 「웨 말슴 못하세요」

金, 「세상더러 뭇구려 하하하」

 

 

나의 이 질문은 실패인 듯 또다시

내, 「그러면 선생의 재산은 지금 얼마나 되서요, 백만원 아니 세상에서는 두분 아버지의 재산을 함처서 500만원은 넘는다 하든데요」

金, 「나 몰나요, 내가 그런걸 엇더케 알어요」

 

 

앗불사 못난 질문을 연겁허 두번이나 發하엿다가 완전히 실패를 보고 말앗다, 질문을 發하엿다가 그 대답을 엇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탐방기자로서의 낙제다, 에-덥다, 땀이나 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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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2.

 

 

 

[이런 剖棺斬屍(부관참시)]  백완기 '인촌 김성수의 삶'.. 그들이 인촌을 아는가?

 

 

 

정부는 지난 13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의 건국공로훈장 서훈을 취소하기로 의결했다고 한다. 그들이 인촌을 아는가?

 

 

백완기 교수가 쓴 책 '인촌 김성수의 삶'을 보면, 인촌(1891~1952)은 자기가 기획을 돕고 후원했던 3·1운동이 실패하자 국권 회복을 위해 민족 역량을 길러야 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양부와 친부를 설득해서 가산을 국가의 경제력 증진과 국민 계몽, 인재 양성에 쏟아 부었다. 조선 최초의 기업인 경성방직을 설립할 때 청년 김성수는 전국을 돌며 주주(株主)를 모집해 국민에게 산업화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깨우치려 노력했다. 동아일보를 창간해서 국민의 눈을 띄워주고 민족정기를 고취했고 중앙학원을 설립하고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의 전신)을 인수해서 민족 사학을 열었다. 뛰어난 인재들을 만나면 해외 유학을 보내 지도자로 양성했다.

 

 

 

그 엄혹한 시기에 어떻게 일제의 '협조'를 얻지 않고 민족 기업, 언론, 교육 기관을 운영할 수 있었겠는가? 일장기 말소 등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누차 정간, 폐간 위기에 놓였다. 반일 데모로 다른 학교에서 퇴학당한 학생을 모두 입학시켰던 중앙고보, 일제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로 지목했던 보성전문은 자주 폐교 위기를 맞았다.

 

 

그럴 때, 인촌이 호기롭게 총독부를 꾸짖어서 경방, 동아일보, 보성전문이 폐업, 폐간, 폐교했으면 우리 민족에 도움이 되었겠는가? 인촌이 굴욕을 참고 이 기관들을 살렸기에 일제하 조선이 덜 춥고 덜 어둡고 덜 빈약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인촌 선생은 독립운동가라면 사상·노선·방법을 막론하고 지원했고, 창씨개명도 끝내 거부했고, 일제가 주겠다는 남작 작위도 거절했다. 그러나 보성전문 농장의 닭들이 굶주려 비실거리는 꼴을 보고는 총독부 축산과 서기를 찾아가 '사정'해서 사료를 얻어다 먹였다고 백 교수는 전한다.

 

 

굶주린 닭을 먹이듯 민족 기업, 언론, 학교를 살리고자 일제에 고개 숙인 것이 민족 반역인가? 총독부에 불려갔을 때, 탄원하러 갔을 때 인촌 선생의 굴욕과 비애를 생각하면 죄스러워진다. 중앙고보, 보성전문 교장으로 학교 건물을 지을 때 인부들과 함께 막일을 하고 청소도 해서 학생들이 수위 영감으로 알았다는 인촌 선생은 절대 훼손해서는 안 되는 민족의 은인이다.

 

 

 

 

 

 

 

 

 

 

 

“인생의 스승,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인촌 사랑방’ 발족식

 

 

 

고창=조건희기자 , 고창=박영민기자 

 

 2019-07-17 

 

 

 

“제 인생의 스승을 두 분만 꼽으라면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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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9)는 ...... 1950년 중앙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할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 만난 인촌 선생은 살면서 만난 누구보다도 인간애가 많았다”며 “3·1운동의 주역인 인촌 선생이 없었다면 독립도, 대한민국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또 “누구나 잘한 일도, 실수한 일도 있다. 정치적으로 찍은 낙인은 시일이 지나면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강연에서 백완기 고려대 명예교수(83)는 인촌 선생이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송계백 선생에게 독립선언서 인쇄 및 여행 비용을 몰래 지원한 일화를 소개하며 “독립운동에 누구보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인촌 선생이 보성전문학교에서 키우던 닭에게 먹일 사료를 구하려고 조선총독부 축산과 서기에게 고개를 숙였던 사례를 들며 “자존심이나 명예보다 굶주린 동포를 더 중시했다”고 강조했다.

 

 

인촌 사랑방이라는 이름은 서울 종로구 계동의 인촌 고택 사랑방에서 건국헌법(제헌헌법)과 농지개혁법의 초안이 사실상 탄생한 점에서 착안했다. 모임을 제헌절에 발족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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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사랑방은 광복절인 다음 달 15일 조강환 동우회장(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의 고창군 본가에서 현판식을 열고 매달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는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717965285581

 

 

 

 

 

 

 

 

 

“상하이 잠입한 인촌 김성수, 안창호 만나 독립자금 전달”

 

 

박효목 기자 , 상하이=권오혁 특파원 

입력 2019-02-21 

 

 

 

평화당 ‘임정 100주년’ 상하이세미나 ‘인촌-임정요인들 회합’ 증언 소개

 

정동영 “100년전 선열정신 기려야”

 

 

 

“인촌 김성수 선생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전달했다.”

 

 

20일 오후 상하이 영안백화점 옥상. 양영두 민주평화당 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공동대표)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이같이 밝혔다. 양 위원장은 “도산 선생 일기에 따르면 이곳 영안 숙소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회합이 빈번했다. 인촌 선생도 이곳에서 비밀 회동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고 말했다. 도산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영안백화점 내 여관에 주로 머물렀다.

 

 

양 위원장은 “도산 선생의 일기에 인촌 선생의 존함이 빠진 건 인촌 선생을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는 도산 선생 비서 역할을 했던 장이욱 전 서울대 총장이 김재순 전 국회의장에게 말한 내용”이라며 “장 전 총장을 모셨던 김 전 의장은 이를 (2013년) 흥사단 10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증언했다”고 설명했다.

 

 

인촌 선생은 1929년 12월 서울을 출발해 부산, 일본을 거쳐 상하이로 갔다는 기록이 있지만 중국에서의 구체적인 활동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양 위원장은 “인촌 선생이 비밀리에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도산 선생을 면담했다는 증언은 역사의 기록”이라고 했다. 양 위원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장 전 총장에 따르면 인촌 선생은 도산 선생이 1938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경성제국대 부속병원(서울대병원) 입원비에도 도움을 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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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homearticleall20190221942179111

 

 

 

 

 

 

 

 

 

 

 

'이철승의 추억'

 

 

  2005-01-26

 

 

이철승(李哲承)의 추억

 

▽민족의 지도자를 만나다▽

 

 

抗日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全州北中(전주북중·전주고등학교 전신) 재학 시절부터 日帝가 강요하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국어(國語-일본어)도 하지 않으면서 민족차별을 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두들겨 패 가정근신 또는 정학을 당해 2학년 때 낙제를 하고 말았다.

 

 

1942년 5학년 졸업반 때에는 『한글은 야만인이 쓰는 부호이다』라며 조선인을 극도로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 노다(野田)를 교실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사건을 일으켜 무기정학을 당했다. 不逞(불령) 조선인 학생으로 낙인 찍혀 출세길이 열리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전문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의 仲父 李錫柱(이석주 제헌의원)는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사상이 나쁜 너는 평생 형무소생활을 거듭하거나 불량배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지도자, 우리 힘으로 세운 민족학교인 普成전문학교(普專·고려대학교 전신)에 진학하라』고 권유해서 普成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마침 당시 仁村 金性洙(인촌 김성수) 선생이 교장으로 계셔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다.

 

 

仁村 선생님은 1914년 일본 와세다大를 졸업하고 기약 없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많은 人材를 양성해야 한다는 敎育立國의 신념 아래 중앙학교(중앙고등학교 전신)를 인수하여 1917년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2년에는 1905년에 李容翊 선생이 설립한 普成전문학교가 경영난에 봉착하자 이를 인수, 교장에 취임했다. 나는 모교를 방문할 때마다 지금 고려대학교 仁村 동상 아래 잔디밭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잡초를 뽑았던 仁村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仁村 선생은 學兵지원을 권유한 적이 없다▽

 

 

 

당시 普專에는 민족진영의 金性洙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張德秀(장덕수), 安浩相(안호상), 兪鎭午(유진오), 陳承錄(진승록), 孫晉泰(손진태) 선생 등과 사회주의 진영의 尹行重(윤행중), 朴克彩(박극채), 崔容達(최용달) 선생 등이 있었다.

 

 

이분들은 이념은 달랐지만 仁村 선생 밑에서 抗日운동에는 대립 없이 서로 합작하면서 후진양성과 자주독립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었다. 광복 후에는 바로 左右翼 진영의 지도자로 갈라져 각 진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때 그곳 우리 普專은 「민족의 향기가 풍기는 젊은이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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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0월20일 學徒志願制(학도지원제)가 실시되자 조선총독부는 경찰, 헌병, 기타 행정기관 각급 전문대학 당국을 총동원하여 학병지원을 강요했다. 그들은 지원성적이 부진하자 지도적 인사들을 총동원해 학병권유를 강요했다. 崔南善, 李光洙 선생 등은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 東京까지 건너가 학병지원을 권유했고, 尹致昊 선생은 『조선 학도들에게도 일본동포들과 어깨를 겨누어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길이 열렸다』라고 권유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仁村 선생의 입장은 어떠하였겠는가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仁村 선생은 『나는 그들의 교육을 맡았지, 전쟁터로 가라 말라고 맡은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였다. 그런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가 일제에 아부하려고 무단히 仁村 선생의 이름을 판 기사가 실렸다. 뒷날 학병에 끌려가게 된 나는 우리들이 출정하는 날까지 仁村 선생으로부터 학병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仁村 선생과 管鮑之交(관포지교)의 동지요, 당시 동아일보 시장이었던 古下 宋鎭禹(고하 송진우) 선생도 병 치료를 핑계삼아 학병 권유운동을 일절 기피하였다.

 

 

어느 날 내가 仁村 선생을 찾아뵌 자리에서 宋선생이 말씀하기를 『일제가 학병지원을 서두르는 것은 그만큼 전황이 불리하다는 증거야. 그들은 이 기회에 교육을 받은 조선인의 싹을 없애 버리려는 것 같다. 알아서들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전국적으로 학병거부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또 다른 날 내가 尹元求 교우와 함께 칭병을 하고 입원 중인 安浩相 선생을 문병했을 때 선생은 내 귀를 끌어당기며 『패전이 확실해, 기피해』라고 말했다.

 

나는 바로 연희전문학교 羅군의 하숙집에서 경성제대 李赫基(이혁기·광복 직후 좌익의 국군준비대 사령관)군과 학병거부운동을 결의, 이 운동을 조직화해서 강력히 전개하기로 했다.

 

 

 

▽조선 총독도 다루기 힘들었던 仁村 선생▽

 

 

 

그러나 이 비밀이 혜화전문학교의 金모 군에 의해 새어나가 金군의 친척인 文모라는 親日거두에 의해 고이소(小磯 ) 당시 조선총독에게 알려졌다. 그는 일의 심각함을 感知(감지)한 탓인지 바로 文씨를 통하여 우리 대표들과의 면담을 요청해 왔다.

 

 

우리들은 난상토의 끝에 면담에 참석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총독과의 면담은 이루어졌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핵심적인 질문을 분담해서 하였다.

 

우리는 『일본은 대동아 聖戰(성전)이라고 하면서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은 모두 독립을 인정하면서 왜 2000만 명의 朝鮮만 독립시키지 않는가 나라의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고이소 총독은 『조선과 일본은 同祖同根(동조동근)이다. 그러기에 조선과 일본은 內鮮一體(내선일체)가 되어야 해, 제군들의 말에 일리는 있어. 그러기 때문에 내가 부른 게 아닌가. 조선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게 바로 내 직책이야』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이소는 옆에 있던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학교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보성전문 李哲承입니다』라고 크게 대답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이모저모 살피더니 『金性洙군은 물샐 틈 없는 인물이지』하고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순간 「仁村 선생은 총독까지도 다루기 거북한 존재이구나」 싶었다. 『이번에 전문대 정비에 보성전문도 폐쇄되는 겁니까』라고 다그쳐 물었으나 분명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총독의 설득에 『못 알아 듣겠습니다.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총독 관저에서 나왔다.

 

 

그 뒤 1944년 조선총독부는 보성전문을 폐쇄시키지 못하고 보성전문을 京城拓殖經濟專門(경성척식경제전문)으로, 연희전문을 京城工業經營專門(경성공업경영전문)으로, 그리고 梨花女專(이화여전), 淑明女專(숙명여전)을 농업지도원 양성소로 바꾸었다. 京城法專(경성법전), 明倫專門(명륜전문)과 惠化專門(혜화전문)은 폐쇄시켰다. 결국은 조선의 전문대학도 창씨개명을 당한 격이 되었다.

 

 

 

▽正義는 실현될 것이다▽

 

 

1944년 12월5일 거행된 壯行會(장행회)는 죽음의 길로 떠나는 우리들을 전송하는 행사였다. 이 장행회에는 李娥珠(이아주 仁村 선생 부인) 여사, 朴恩惠(박은혜 장덕수 선생 부인) 여사도 참석하였다. 仁村 선생은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교장실에 심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식이 시작되자 연단에 올라 『나는 여러분의 교육을 맡았지, 입영을 맡은 게 아닌데 오늘 이렇게 모였다』며 비통한 심정을 말씀하셨다.

 

 

학생감 張德秀 선생은 『여러분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비극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우리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집단적인 훈련을 받고 행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죽으러 간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내일을 위해 여러분이 심신을 단련하러 간다고 생각하라』 라고 말씀하였다.

 

 

이어 安浩相 박사는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땅에는 민족의 정기가 있다. 그리고 사람 가슴속의 양심은 그 어떤 총칼로도 결코 꺾을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양심대로 행동하면 땅에는 정의가 가득할 것이요, 하늘의 태양은 더욱 빛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자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도서관장이었던 孫晋泰 선생은 『나는 어제 밤 꿈을 꾸었는데 제군들이 나를 번쩍 들어 하늘에 헹가래치며 만세를 불렀다. 나도 따라 만세를 부르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그것은 꿈이었다』고 했다. 「言中有骨(언중유골)」, 우리나라의 독립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장행회가 끝나자 본관 앞 운동장에서 우리들은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지막 술잔을 들며 李娥珠 여사가 손수 만들어 주신 「카레라이스」를 먹었다. 우리들은 통한의 울분을 「스톰(storm·폭풍)」으로 폭발시켜 스크럼을 짜고 「입실렌트·체이호」의 校號(교호)를 외쳤다. 그 순간 누군가 『일본놈의 경찰서를 쳐부수자』 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시위대를 형성하여 안암동을 빠져나갔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金性洙 교장선생이 나를 급히 부르셨다. 『이 사람들 일을 저지르겠어. 자네 흥분해서 일을 저지르면 학교는 폐쇄되고 그나마 후배들은 배울 곳조차 없게 돼』 하면서 『오늘이 있듯이 내일도 있네. 설움 속에서 시름을 씻고 일어서는 것이 우리 조선민족이야! 단칼에 베려 하지 말고 매사를 길게 보게』라고 하였다. 나는 흥분된 시위대의 선두를 다시 학교로 돌리고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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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5012681538721

 

 

 

 

 

 

 

 

 

 

 

 

인촌 김성수 선생, 각계 지도자들의 증언

 

 

      2002-03-31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1891∼1955) 선생은 우리 겨레가 일제의 압제 아래 신음할 때 교육 언론 산업분야에서 민족의 역량을 키워 독립의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했던 선각자였다.

 

동아일보는 창간 82주년을 맞아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했던 인촌과 동(同)시대를 살았던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인촌의 참모습을 재조명한다. 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서 동시대인들의 증언은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창씨개명-훈장 거부▼

 

 

1891년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현 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태어난 인촌은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의 기초를 마련했다. 1919년에는 경성방직을 설립해 민족기업을 일으켰고,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해 억눌린 민족의 염원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인촌은 이어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인재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언젠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민족의 역량과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김수환(金壽煥·80) 추기경은 1991년 10월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추모했다. 김 추기경은 특히 “스스로 몸을 낮추어 항상 겸양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뒷자리에서 남의 공로를 드높여 주는 것이 인촌 선생의 인품이자 경륜이었다”고 회고했다.

 

 

1960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급서한 야당 지도자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1894∼1960) 선생은 1958년 펴낸 회고록에서 “인촌 선생은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야당 시절 인촌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1993년 8월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

 

 

 

인촌은 특히 동아일보를 창간하면서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함’으로써 우리 겨레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는 민족의식 자체가 희박했다는 점에 비추어 인촌의 선각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또한 2000년 3월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며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는 그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맞는 새천년에도 참으로 합당하다”고 말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인촌은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했다. 인촌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자 창씨개명 아이디어를 낸 총독부 학무국장이 직접 창씨개명을 종용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인촌은 또 일제로부터 어떤 훈장이나 작위도 받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창간 이후 1940년 8월 강제 폐간될 때까지 20년 동안 정간 4회, 발매금지 2000회 이상, 신문압수 89회, 기사삭제 연 2423회의 제재를 당했던 것도 ‘민족의 입’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고초였다.

 

 

 

▼ 투병 안창호선생 도와 ▼

 

 

인촌은 국내에서 활동하면서도 해외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을 음양으로 지원했다.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1889∼1930) 장군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강훈(李康勳·99) 전 광복회장은 인촌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91년 11월11일 경기 과천시 서울대공원에서 열린 인촌 동상 제막식에서 인촌의 독립운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총칼로써 왜적 몇 사람을 해치울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거대한 국력을 등에 업고 밀어닥치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할 수는 없다. (중략) 인촌 선생의 언론 교육 산업활동은 바로 독립의 길로 국민을 인도하는 독립자강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강훈옹의 회고는 계속된다.

 

“인촌께서는 1929년 말 구미 여행길에 상하이 임시정부에 들러 임정이 운영하던 학교에 큰 돈을 기부했다. 임정 요인들의 노고에 대한 인촌 선생의 진심어린 경의에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1878∼1938)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크게 감동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正大) 스님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3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병원에서 투병 중일 때 가족들이 인촌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인촌은 남들 앞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했으나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을 전달했다”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도산은 “인촌이 따로 사람을 보내 많은 협조를 했어. 정말 인촌은 사려 깊은 사람이야”라고 측근을 통해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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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조(徐丙(·80) 전 연합신문 편집부국장은 회고록 ‘정치사의 현장증언’(1981)에서 기자 시절 취재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한 독립단원이 인촌의 집에 찾아가 독립자금을 달라고 조르자 인촌은 신분을 확인한 뒤 사랑방에 있던 금고 문을 열어놓고 자리를 비켜줬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그제서야 자신이 없는 사이에 돈을 가져가도 좋다는 뜻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독립자금을 가져가 요긴하게 쓴 일이 있었다. 이때 인촌 집에 찾아갔던 사람은 바로 광복 후 제헌의회 의원을 지낸 장홍염(張洪琰) 의원이었다. 반민특위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던 장 의원이 이 일화를 동료 의원들에게 뒤늦게 털어놓자 모두들 감탄했다.”

 

 

광복 직후 국회 반민특위에서 가려낸 친일인사 명단에 인촌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정치 경제 언론 교육분야 등 다방면에 걸친 업적뿐만 아니라 이런 숨은 활동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서재필 “인촌은 대통령감”▼

 

 

인촌은 일제 치하에서도 주도면밀하게 ‘광복 이후 조선’을 준비했다.

‘독립신문’을 창간했던 서재필(徐載弼·1866∼1951) 박사가 광복 후인 1947년 10월 고려대에서 강연했을 때의 일화. 한 학생이 서 박사에게 “초대 대통령감으로는 누구를 생각하느냐”고 묻자 서 박사는 빙그레 웃더니 “왜 멀리서 찾느냐”며 옆에 있는 인촌을 가리켰다. 그리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체포, 투옥되었던 독립투사들은 분명 애국자들이다. 그러나 인촌과 같이 국내에 남아 장래 한국의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자신의 생을 바친 사람들 역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촌은 또 고려대 학생들에게 ‘전인적 인간’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완전한 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다. 이 (완전한) 사람은 권리를 아는 동시에 의무를 알며 자유를 아는 동시에 책임을 알고 개인을 아는 동시에 사회를 알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까닭이다. (중략) 또 이 완전한 개인이란 자기가 자기를 결치(結治)할 줄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947년 11월3일 인촌이 고려대신문 창간호에 기고한 ‘민주주의는 자치를 기초로’ 중에서 고려대 인촌기념관 내 인촌상 뒤 현판에 기록된 내용)

 

 

 

▼ 독재정권에 단호히 저항 ▼

 

 

 

광복이 되자 인촌은 자유민주주의 원칙하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진력했다. 조선민족청년단장 등을 지낸 이범석(李範奭·1900∼1972) 초대 국무총리에 따르면 인촌은 해외 독립운동세력으로부터 건국을 같이 준비하고 싶은 국내 지도자로 손꼽혔다.

 

 

이범석은 자신이 주도한 1945년 8월20일 광복군의 국내 침투작전인 ‘독수리 계획’이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되자 같은 해 8월18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귀국을 시도했다.

 

“우리는 (비행장을) 감시하는 헌병 중에 한국 사람을 발견하게 됐다. 그래서 한국 국내에서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김성수씨 등에게 연락의 쪽지를 부탁하고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범석의 회고록 ‘우둥불’ 중)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자 인촌은 소련과 김일성(金日成)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이승만(李承晩·1875∼1965)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다. 좌우합작에 매달려 있다가는 남한마저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건국 후 이승만이 독재권력을 휘두르자 야당 육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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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은 번영된 민족통일국가의 염원을 안은 채 1955년 2월18일 6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인촌이 별세하자 각계 각층 조문객들이 빈소에 운집했고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100만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계동 사저에 마련된 빈소를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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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2033178030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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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의 창시자였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이 새로운 국제 질서를 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천자의 나라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의 다른 나라들을 조공의 대상으로 삼는 중국식 국제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형성된 근대적 주권국가 체계를 전 세계에 동등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식민지 조선인들은 즉각 호응했다. 3·1 운동은 단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중국의 망령을 떨쳐내고, 미국이 제시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동참하고자 하는 거대한 몸부림이었다.

 

 

대한민국은 그 출발부터 새로운 국제질서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는 대한국민이 대한민국을 형성해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낸 최초이자 최고의 작품인 것이다.

 

 

해방된 한반도에 단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미국은 1947년 10월 유엔 총회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그리하여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1948년 1월 9일 서울에 입국했다.

 

 

단독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이루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좌파 계열의 정치, 사회 단체들은 선거 보이콧을 넘어 폭력과 테러로 새로운 정부 수립을 막으려 들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38선 이북으로 가지 못한 건 소련의 반대 때문이었지만, 유엔은 그저 미국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며, 그러니 분단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유엔 회원국 중 21국이 군대 파견을 신청했고 그중 16국이 실제로 병력을 보냈다. 반대로 북한의 편에서 전쟁을 한 나라는 소련과 중국뿐이었다. 유엔의 선거로 만들어진 나라 대한민국은 유엔의 전쟁으로 지켜낸 나라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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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daum.netv20230717032124092

 

[朝鮮칼럼] IAEA 음모론… 75년 전에도 그랬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3.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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