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김성수 2023.10.28 조회: 402971

 

 

                         김성수

 

 

 

 

 

 

          1949.10.15     민주국민당  전국대의원대회

 

 

 

[ ..... 유엔결의에 의하여 총선거를 북한에서도 실시했다면.....벌써 통일 .......

 

..... 그것은 거부하고 날마다 몰려와서 양민살해·방화·파괴·약탈을 ..........   ]

 

 

 

[ ...... 화평통일을 운운하는 것은 다 무엇이며  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 무엇입니까. ........     ]

 

 

 

 

民主國民黨,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

 

 

 

연월일 1949년 10월 15일

출전 서울신문,동아일보 1949년 10월 17일

 

 

 

民主國民黨,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

 

 

민주국민당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 15일 하오 회의는 2시부터 의장 金性洙씨 사회로 속개되었다. 먼저 咸尙勳씨의 국제정치정세 보고, 金佑枰씨의 국제경제정세 보고, 李容稷씨의 국제군사 보고, 趙憲泳씨의 국내정세 보고가 있었다. 이어 당무·재무·감찰위원회 보고가 있었고 지방정세 보고가 있은 후 하오 6시 반 제1일 대회는 휴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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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일인 16일 대회는 상오 10시부터 의장 申翼熙씨 사회로 속개되었다. 먼저 金俊淵씨의 대회선언문 낭독이 있은 후 이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다음 정강정책에 있어서는 정치의 6항 ‘토지분배의 조속 실시’를 ‘농지개혁법의 조속 실시’로 수정 통과시킨 후 정책세목에 대해서는 문구수정 등은 中執에 일임할 것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黨憲에 있어서는 ‘원안대로 통과시키고 수정할 점이 있으면 차기 대회에서 수정할 것’의 동의가 성립되어 표결에 부친 바 과반수로 통과시켰다.

(서울신문 1949. 10. 17)

 

 

 

민주국민당 창당 이래 처음으로 개최된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 석상에서 同黨 최고위원 金性洙씨는 제반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행하였다.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지 만 1년 2개월 되는 오늘 본 당대회를 열게 된 것을 특히 의의 깊게 생각하며 당원 동지와 함께 충심으로 경축하여 마지않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해방전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후 4년 간 우리는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위하여 실로 험난한 형극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첫째,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미·소 공동으로 우리에게 권해서 씌우려고 하던 신탁통치를 우리는 결사적으로 반대해서 이것을 벗었습니다. 둘째, 한국문제를 1 대 1인 미소공위에 맡겨서는 결정지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 한국문제 해결을 유엔총회에 넘길 것을 주장해서 그것을 성공하였습니다. 셋째, 좌우합작이니 남북협상이니 해서 정당·사회단의 협의에 의하여 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해서 합의에 도달할 수도 없고 혼란만 더할 것이니 천하의 공론을 좇는 민주주의의 총칙에 의하여 총선거를 통해서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자고 주장해서 이것을 성공하였습니다. 북부지역의 선거를 소련이 방해하므로 다시 가능지역의 선거를 주장해서 이것도 또한 성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 독립을 도와주려고 하면서 한국의 실정에 어두운 友邦諸國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고치게 하고 방침을 변경하게 해서 마침내 우리 나라가 신탁통치 없는 당당한 독립국가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을 수립한 공은 그 전부를 우리가 차지하더라도 결코 무리하다고 비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박수)

 

그렇다고 결코 그 공에 대한 갚음을 딴 데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그것으로써 우리는 벌써 우리의 노력에 대한 천배 만배의 갚음을 다 받은 것입니다. (박수) 실로 감개무량이며 다시금 감격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우리의 임무가 다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앞에는 더 험난한 길이 있음을 깨닫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열성을 다해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뛰어난 치적을 나타내고 실력을 길러서 국제적 신임을 두텁게 함으로써 하루빨리 失地를 회복해서 무서운 철의 장막 속에서 자유를 잃고 飢寒에 신음하는 북한 백만 동포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박수) 우리의 치적을 높이고 북방 모략을 분쇄해서 완전한 통일을 달성하는데는 官民一致·軍民一致·警民一致·軍警一致를 해야 합니다. (박수)

 

 

그런데 우리에게는 시급히 고쳐야 할 큰 병폐가 있으니 그것은 의무를 소홀히 하고 권리를 남용하며 互讓의 德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 시국에 일선의 군경과 관리의 노고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으며 오직 충심으로 감사하고 동정을 금할 수 없으나 그 중 소수분자의 탈선적인 권리의 남용·악용과 군경의 대립·알력 등으로 민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하는 말이 자주 들려오니 실로 우려되는 바 적지 않습니다.

 

本黨 출신인 관·군·경에 종사하시는 여러분은 특히 이 점에 유의해서 廉潔과 공정과 겸양과 과단으로써 솔선수범 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수)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국민이 정치를 비판하고 충고하고 시정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해야 할 것은 어디까지든지 잘 하게 하기 위하여 바로잡기 위하여 건설적이요, 責善的인 충고나 비판을 해야할 것이요, 시기·질투의 감정이나 憂國自高의 심리에서 吹毛覓疵를 하거나 과장을 하거나 無根의 사실을 남의 말만 듣고 비난공격을 일삼는 것은 결과에 있어서 중상선전으로 관민을 이간하고 정부의 위신을 추락하고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와 통하는 것이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소위 조국 화평통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이 잠깐 듣기에는 귀에 달콤하나 그 뒤에는 실로 전율할 모략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조국이라 외치면서 조국을 부인하고 화평통일을 부르짖으면서 화평통일을 거부한 자는 곧 조국 화평통일을 떠드는 그 자들인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박수)

 

 

평양의 거리를 스탈린街라 개칭하고 말할 때마다 ‘英邁하신 스탈린 대원수께서’하며 ‘위대한 소련군대’가 하면서도 言必稱 조국이니 민족이니 합니다. 유엔결의에 의하여 총선거를 북한에서도 실시했다면 전세계가 환호하는 가운데 화기애애하게 통일이란 말조차 필요 없이 벌써 통일이 되었을 것인데 그것은 거부하고 날마다 몰려와서 양민살해·방화·파괴·약탈을 일삼고 있습니다. 선전포고를 한 전쟁에도 적의 비전투원은 죽이지 않으며 무방비 도시는 폭격을 않는 것이 전쟁도덕이요, 국제공약이거늘 이 반역도배들은 전쟁에서도 할 수 없고 인간이 할 수 없고 금수도 할 수 없는 잔인악독한 행동을 동족에게 동포에게 날마다 밤마다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 자들이 화평통일을 운운하는 것은 다 무엇이며 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다 무엇입니까. 그는 나라를 팔고 민족을 말살하려는 화평통일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박수)

 

 

 

‘정치는 모략이다’ 하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나는 이 말을 가장 싫어하고 위험시하고 한심하게 여깁니다. 큰일이 모략으로 성공하는 일이 없습니다. 모략으로 성공한 일이 오래가는 법도 없습니다. (박수) 만일 모략이 성공하여 오래 계속한다면 그 나라는 망하고 그 민족은 쇠퇴할 것입니다. 본 당은 천하의 公黨으로서 오직 國利民福을 위하고 자손만대의 대책을 꾀하는 책임을 지고 있으니 정치는 어디까지든지 정의요 성의요 노력이라는 것을 신조로 하고 사악한 모략을 배격하여야 할 것입니다. (박수)

 

 

 

끝으로 우리는 정당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정당은 무슨 벼슬이나 이권을 구하는 사람들만이 다니는 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민주정치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국가에 관리는 그야말로 公僕 즉 민중을 위한 使用人이요 연락원이며 국민이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자기의 원하는 정치를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박수) 가령 교통시설의 확충을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교통부의 관리된 사람이나 그 청원을 맡을 사람만이 아닐 것입니다. 누가 장관이고 누가 의원을 하든지 車掌이 누구며 운전수가 누구든지 기차만 다니면 모든 사람이 다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벼슬이야 누가 하든지 국민이 다 잘 살 수 있는 정치를 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당을 택해서 지지할 필요와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일반 민중을 지도계몽하는데 힘써 주기 바랍니다.”

 

 

◊ 민국당 전국대회 개막

 

 

민주국민당 전당대의원대회 제2일은 申翼熙의장 사회하에 상오 10시부터 금반 대회의 가장 중심적인 안건심의에 들어갔는데 벽두에 별항과 같은 대회선언서를 金俊淵씨가 낭독한 후 무수정 통과하고, 이어 梁源模씨가 낭독한 정강정책이 통과, 崔斗善씨의 간단한 설명이 있은 다음 당헌의 통과, 유엔에 보내는 메시지를 李弘俊씨가 낭독 통과한 연후, 임원선정에 들어가 그 선거방법은 최고위원 4씨와 각 도 대표 10명에게 일임하여 당헌에 의한 중앙집행위원(340명 이내)을 선출케 한 후 李榮俊씨의 결산 及 예산안 승인과 徐相日씨의 당면정책 심의를 끝마치고 일차 휴회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후 회의에서는 地方議案 심의와 기타 사항을 토의하고 池大亨 최고위원의 폐회사로 대회는 폐회되었고, 중앙학교 後庭에서 화기애애한 다과회가 있었다 한다.

 

(동아일보 1949. 10. 17)

 

 

 

민주국민당 상임당무위원 趙憲泳씨(국회의원)는 지난 15일 同黨 제1회 전국대회에서 국내 정세에 관하여 보고를 행하였는데 이는 혼돈한 현 정세를 간명하게 要述한 것으로서 讀者諸賢의 참고가 되겠기에 다시 소개한다.

 

 

작년 5월 10일 선거에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절대한 성공을 거두어서 국회가 성립되고 헌법이 제정되고 대한민국이 수립되어서 유엔의 승인을 얻고 이어 그에 가입한 다수 민주주의국가가 개별적으로 정식 승인을 하게 됨에 이에 따라 국내 정세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첫째, 미군정이 사뭇 계속되고 독립할 희망이 없지 않은가 의구하던 사람들이 그 의혹이 완전히 풀리는 동시에 우리도 우리 정부를 가졌다는 환희와 만족을 느끼게 되었다. 둘째, 해방후 4, 5년 동안 공산당이 모략을 선전한 것이 모두 허위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래서 민족적 자주독립을 얻는 길이나 정말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는 길이나 국제적 지지와 승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모두 민족진영노선이요, 공산당노선이 아님을 전국민이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 민주국민당의 발족

 

 

대한민국정부 수립은 곧 민족진영의 큰 승리를 의미하며 그 결과의 하나로 오늘 이 민주국민당의 제1회 전국대회를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 이 모임은 한 정당의 대회라기보다도 갈려 있던 민족진영의 주력부대가 한 조직체가 되어서 한마음 한뜻으로 민족의 운명을 타개하고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려 결의를 굳게 하는 자리다.

 

 

해방후 오늘까지 소위 인민공화국을 배격하고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물리치고 5·10선거를 추진한 단체가 한국민주당이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요, 대동청년단임은 우리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가 다 아는 바이니 대한민국은 진실로 이 세 단체를 기초로 하고 선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단체가 합동해서 민주국민당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은 실로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크게 경하할 일이다. 이 획기적 전환을 계기로 일부 인사의 탈락은 없지 않으나 이런 小類의 유동은 아무 단체에나 또는 평시에도 있는 일이요, 현하 당 최고위원에 대동청년단장·한국민주당위원장이 계신 것으로서 이 3단체의 합동은 명확한 것이다. 그런즉 민주국민당은 모름지기 대한민국의 지주로서의 중대한 책임을 지고 신중한 태도와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분발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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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동아일보 1949년 10월 17일

 

 

 

 

 

 

 

 

 

 

      “어떤 독립투사도 해방 후 ‘조선·동아일보가 친일했으니 복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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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떤 독립투사도 해방 후 ‘조선·동아일보가 친일했으니 복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1920년대 동아·조선이 민족에 소중한 자산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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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679

 

한홍구 “조선·동아 욕만 해선 안 바뀌어”

기자명 김도연 기자   입력 201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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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헌법 86조에 농지개혁이 명시되어 있다. 농지개혁은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자는 것이다. 조선 8도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진 김성수가 제헌헌법을 만들 때 그 조항에 반대하지 않았다. 자기 땅을 다 뺏어서 나눠준다는데도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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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문제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장덕수는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학도병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내가 장덕수가 학도병 연설을 하고 젊은이를 군대로 내보내지 않았느냐라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야 이놈아, 내가 그 연설을 들었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장덕수가 그 연설을 울면서 했고, 아버지와 학생들도 울면서 들었다는 거다. 장덕수가 진짜로 친일파여서 그런 연설을 했으면, 이철승 같은 깡패가 돌아와서 장덕수를 때려죽였지 가만뒀겠느냐며, 학도병으로 갔던 학생들이 살아 돌아와 장덕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하시더라. 학도병 연설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학도병들은 장덕수를 아무도 친일파라고 보지 않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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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5480

 

..한홍구 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기사입력 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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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헌법의 농지개혁 조항은 지주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주세력의 결집체인 한국민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인촌 김성수는 그 자신이 당시 조선 팔도에서 첫 손에 꼽히는 땅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보성전문 시절부터 교주와 교수로 김성수와 깊은 인연을 가진 유진오는 헌법조항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김성수를 만나 “농지개혁만이 공산당을 막는 최량의 길”이라고 설득했고, 김성수는 유진오의 말에 “그것도 그렇겠다”라며 결국 농지개혁에 찬성했다. (헌법기초회고록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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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김성수나 조선일보의 방응모가 친일을 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해방 후 어느 독립투사도 일제가 폐간시켜버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친일을 했다고 복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보험료’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겠지만, 만해 한용운 같은 많은 독립지사들이 풍족하지는 않아도 끼니를 때울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었던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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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885

[기고한홍구] 제헌헌법과 진보적 민주주의 中

농지개혁과 국민 만들기.. 땅부자 김성수도 동의한 농지개혁

1

 

 

 

 

 

 

 

 

 

 

 

[ ..... 총칼 밑에서 국민과 같이 울고 웃으면서 

언제 해방될지 모르는 백년대계를 세웠다는 것은 

해외 독립운동자보다 월등하게 어려웠다. 더 애국자다. .......     ]

 

 

 

소석 이철승,  인촌 김성수 선생과 ‘깊은 인연’

 

 

       2016-02-27

 

 

 

소석 이철승 선생은 유년 시절 한국인을 무시하는 

일본인 교사를 내동댕이쳤던 열혈 청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소석을 보듬어준 사람은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습니다. 박준회 기자입니다.

 

 

[기사내용]

 

 

1922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지만,

전주에서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소석 이철승 전 헌정회장.

 

소석은 어렸을 적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끝까지 창씨 개명을 거부하며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엔

한국인을 멸시하던 일본인 교사를

교실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상급학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던 소석을 받아준 곳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였습니다.

 

 

[인터뷰 이철승  前 헌정회장(2013년 채널A 인터뷰 中)]

 

(인촌 김성수 선생이) 하루종일 학생운동 뛰어다닌 놈이 

졸려 죽겠는데 손님 다 가면 나를 부르셔.

막 졸면서 하면 저놈 또 존다 그러면서 

요즘 학교가 어떻게 되느냐.

전북 학생은 어떻고 보성전문 고대는 어떠냐.

 

 

 

소석은 일제 치하 독립운동 못지 않게

학교를 세우고 운영한 건 대단한 일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총칼 밑에서 국민과 같이 울고 웃으면서 

언제 해방될지 모르는 백년대계를 세웠다는 것은 

해외 독립운동자보다 월등하게 어려웠다. 더 애국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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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channela.comnewsmainnews_detailPage.dopublishId=76712558-1

 

소석 이철승, 인촌 김성수 선생과 ‘깊은 인연’

2016-02-27 

 

 

 

 

 

 

 

                  

 

                 1945.9.

 

 

 

   [     朝鮮人民共和國  =   文敎部長 金性洙     ]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연월일1945년 09월 14일  

출전매일신보 1945년 09월 15일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朝鮮人民共和國에서는 지난 6日 全國人民代表會議에서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그동안 연일 정부조각에 주력한 결과 다음과 같은 부서를 결정 14日 政府로부터 발표하다.

 

 

◊ 朝鮮人民共和國政府 部署

 

 

主席 李承晩

 

副主席 呂運亨

國務總理 許憲

內部部長 金九

(臨時代理 許憲)

外交部長 金奎植

(臨時代理 呂運亨)

軍事部長 金元鳳

(臨時代理 金世鎔)

 

財政部長 曹晩植

保安部長 崔容達

司法部長 金炳魯

(臨時代理 許憲)

 

文敎部長 金性洙

(臨時代理 李萬珪)

宣傳部長 李觀述

經濟部長 河弼源

農林部長 康基德

保健部長 李萬珪

 

遞信部長 申翼熙

(臨時代理 李康國)

交通部長 洪南杓

勞動部長 李胃相

書記長 申康玉

法制局長 崔益翰

企劃局長 鄭栢

 

 

 

 

 

 

 

             *

 

 

김성수를 친일파라 보았다면  인공이 문교부장으로 선정했을 리가 없습니다.

 

 

주목할 점은 빨갱이들이 뽕가는 위대한 수령은 인공 명단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 ...... 송진우 ....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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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은 송진우가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언급했다. 그는 송진우가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미일전쟁이 계속해서 일어나 일본이 전승가도를 달리고 있는 동안에도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송진우로부터 ‘수백번’은 들었다는 말을 적고 있다.

 

 

 

일본이 망하기는 꼭 망한다. 그런데 그들이 형세가 궁하게 되면 우리 조선 사람에게 자치를 준다고 할 것이고 형세가 아주 궁하게 되어서 진퇴유곡의 경우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조선 사람에게 독립을 허여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자치를 준다고 할 때에 나서지 아니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독립을 준다고 하는 때에는 결코 나서서는 안된다. 그때가 우리에게 위험할 때다. 망해가는 놈의 손에서 정권을 받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불란서의 페탕정권을 보라. 중국의 왕조명 정권을 보라. 또 비율빈의 라우렐정권을 보라. 그들이 필경 허수아비 정권밖에 되지 못할 것이고 민족반역자의 이름을 듣게 된다.註 037

 

 

 

송진우가 제국주의세력의 꼭두각시 정권들의 사례를 들어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汪兆銘(1885~1944)은 국민당정부의 행정원장으로 있다가 중일전쟁 중에 반공과 대일화평을 기도하여 1940년 남경에 新國民政府를 수립하고 주석으로 취임했으나 일제의 괴뢰정부로 간주되었다. 페탕(H.P, Petain;1856~1951)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의 베르덩(Verdun)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고 입각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에 협력하여 비시(Vichy)에서 괴뢰정부를 세워 국가주석이 되었다. 종전과 함께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사망했다. 라우렐(J.P. Laurel ;1891~1959)은 상원의원과 대법관을 지내고 일제의 필리핀 점령기간인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괴뢰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일했다. 이 때문에 전후 전범으로 기소되었다가 석방되었다.註 038

 

송진우가 행정권의 일부든 전부든 그것을 받으면 일제의 협력자가 되고 괴뢰가 되며 민족의 지탄을 받는 만큼 그 길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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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그가 일제말기에 동아일보 강제 폐간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나 공식적으로 모든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세계정세에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동아일보 동료들과 재직시절에 알게 된 지인들을 통해 적지 않은 정보를 듣고 있었다.註 040

 

 

단파방송에서 청취된 정보를 제공 받은 것도 하나의 예였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출신인 홍익범은 1942년 하반기 이래 성기석과 송남헌 등으로부터 들은, 일본에 선전을 포고한 중경임시정부의 존재와 미주에서 이승만의 활약상 등 단파방송의 정보를 송진우와 김병로, 이인 등에게 전했다. 홍익범은 일경에 체포된 뒤 혹독한 고문에도 자신이 단파방송 정보를 전파한 인사들의 이름을 끝내 자백하지 않음으로써 송진우와 김병로, 이인은 무사할 수 있었다.註 041

 

 

‘일제 필망론’도 이러한 정보들에 근거한 판단의 결과였다. 송진우가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가 폐간된 뒤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수수방관하지는 않았다. 1943년경 그는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동아일보 관계자 및 지방 유지들을 만났다. 이 전국 순회에서 그는 동아일보 관계자들의 내부결속과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패전을 전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註 042 1944년 겨울 송진우는 자신을 찾아온 林炳哲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이제 독립은 몇 달 안 남았다”註 043고 자신 있게 말했다고 한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동맹의 사례와 비교하여 종전 후를 대비한 구체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대책이 무책’이라는 핑계로 침묵만을 지켰다고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국내에 동아일보만큼 전국적인 연락망을 가진 조직은 없었다.註 044 송진우는 동아일보 폐간 직후 구성된 淸算委員會를 중심으로 1942년 11월 부동산(사옥)의 임대차 및 이에 관련되는 부대사업을 위해 발족된 東本社 사장으로 취임해 동아일보 조직의 명맥을 유지하였다.註 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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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館論叢 第108輯      8·15 전후 朝鮮總督府의 정책과 朝鮮政治勢力의 대응(이현주)     Ⅲ. 치안대책 ‘위임’과 조선 정치세력의 선택      2. 국내 민족주의 우파의 선택

 

 

 

 

 

 

                   

 

항일 단파방송 사건 (1942년 6월 13일)

 

 

 

항일단파방송 사건은 1942년에 일제치하 경성(오늘날 서울)의 경성방송국(현재  KBS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건으로 이승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활동으로 들 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에게 외국 정세가 알려지지 않기 위해 '외국 단파 방송 청취 금지령'의 공표 및 선교사 추방 등 단속을 강화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방지할 수는 없었고, 이렇게 몰래 듣는 사람들은 '미국의 소리'의 한국어 방송이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중국어 방송을 듣곤 했다.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6월-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매번 격려하는 방송을 활동했었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처음 방송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미국의 소리방송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여기서 이승만이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라디오로 통해 미국 워싱턴 D.C로부터 '일제는 전쟁에 패망할 것이다. 우리 임시정부는 연합군의 승인을 얻을것이다. 우리는 독립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다.'는 주요 내용으로 선전하였다. 당시 이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었던 이들은 소수(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등)였는데, 이는 밀청했던 사람들로부터 입으로 전래되고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에 의하면 이 사건이 국내에서 이승만의 인지도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워싱턴에서 항일단파방송을 하였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다.

 

 

이 항일단파방송을 몰래 밀청하다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잡혀간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는데, 이들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라고 한다. 조선일보 주필로 유명한 칼럼가 이규태 선생의 형제도 이걸 듣다가 처벌당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 때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 KBS 본관 앞에 있다.

 

 

 

경성방송국과 개성방송국의 단파 방송 청취 적발로 불거진 사건에 여운형, 허헌, 백관수, 함상훈 등 해방 후 건준과 한민당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폭넓게 연루되었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였던 송남헌은 이렇게 회고했다.

 

 

'1942년 6월경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 박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2300만 동포들이여 조국 광복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동포는 일심협력하여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전쟁 협력을 거부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한 연설을 나는 직접 들었다. 이 방송을 들은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고, 흥분해서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가 그대로 전했다.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서 모두가 금방 독립이라도 되는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시내로 퍼져나갔다.' (심지연, 송남헌 회고록(한울 펴냄), 40쪽)

 

 

이승만은 1942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몇 차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행했고, 독립을 간절히 바라던 국내 사람들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독립의 희망과 겹쳐져 울렸던 것이다. 

 

 

 

 

《방송 원고》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데서든지 내 말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한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300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악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감옥 철창에서 백방 악형과 학대를 받는 우리 총애 남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왜적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 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 가지 관계로 하야 대병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하야 온 세상이 다 저희 것으로 알지마는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 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야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 김약산, 유동열, 조성환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 중국 총사령장 장개석 장군과 그 부인의 원조로 군비·군물을 지배하며 정식으로 승인하야 완전한 독립국 군대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미주와 하와이와 멕시코와 큐바의 각지의 우리 동포가 재정을 연속 부송하는 중이며, 따라서 군비·군물의 거대한 후원을 연속히 보내게 되리니, 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고진감래가 쉽지 아니하나니 37년 간을 남의 나라 영지에서 숨겨서 근거를 삼고 얼고 주리며 원수를 대적하던 우리 독립군이 지금은 중국과 영·미국의 당당한 연맹군으로 왜적을 타파할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을 세계에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천추에 발포할 것이 이 기회에 있다 합니다.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서백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타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데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임경업, 김덕령 등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 의사들의 공훈으로 강포·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야 저희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한 역사에 한 두번이 아니었나니 우리 민족의 용기를 발휘하는 날은 지금도 또다시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지에서는 아직 비밀히 준비하야 숨겨 두었다가 내외의 준비가 다 되는 날에는 우리가 여기서 공포할 거이니 그제에는 일시에 일어나서 우리 금수강산에 발붙이고 있는 왜적은 일제히 함몰하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워싱턴에서 몇몇 동포와 미국 친구·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매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워 옵니다. 승인을 얻는 대로 군비·군물의 후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망을 가지고 이 소식을 전하니 이것이 즉 자유의 소식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씨의 선언과 같이 우리의 목적은 왜적을 파한 후에야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백배나 용기를 내야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번 표시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 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며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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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 '두리틀 공습'    

 

 

 

       여운형  일생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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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제 말기의 독립운동과 광복 이후 정치활동

 

 

5.1. 조선건국동맹 결성과 광복 직후 치안 유지 활동

 

 

중앙일보가 폐간되고 할 일이 없어진 여운형은 결혼식 주례사로, 각종 행사 연사로 소일하다가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이에 대해 자신의 아들이 일본 호세이대학에 입학하는 관계로 일본행을 결정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중일전쟁이 터진 뒤 일본이 조선에서의 독립 운동 활동에 대해 탄압을 강화하여 활동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고, 중일 전쟁과 관련해 일본 고위급 관료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1937년 일본이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여운형은 그때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다. 여운형은 중일전쟁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원료 및 소비시장을 둘러싼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 과정에서 일본이 정치·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중국의 상황을 이용하여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써 중국에서 일정한 이권을 확보하고 싶어하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중국 독점을 절대 허용할 리 없고, 미국과 영국은 어떻게든 일본에 대항할 것이며, 일본은 양국의 공동 공격 앞에 결국 자멸할 것이라고 봤다.[25] 1937년 일본이 노구교 사건을 조작하자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영국·미국이 중국에서 장거리 경주를 하는데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영국이 패권을 잡았고, 전쟁 중에는 일본이 잡았고, 전쟁 후에는 미국이 패권을 잡아 미국의 차관이 단연 증가하니 일본은 자기가 독점하지 못한데 분개하여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점은 영미가 절대 불허한다. 이때에 양국은 반드시 합작하여 일본에 대항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요소인 원료시장 소비시장 투자시장 이 3가지가 중국에는 구비되어 있다. 이런 좋은 시장인 중국이 경제적 자립을 못하였으니 저기압이 생긴 곳에 공기가 밀려들 듯 자본주의 세력은 이 저기압 시장으로 밀려들어갈 것이고, 어느 일국의 독점은 불가능할 것이다. 각국이 침입하는 중에 일국의 세를 제지하고 중국은 갱생의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나 영국이 이런 시장을 어느 한 나라의 독점에 맡겨둘 리가 없는데 더욱이 저들이 만만히 보고 있는 일본의 독점이야말로 허용할 리가 절대 없다. 영미는 반드시 중국의 운동을 빌려가지고 일본과 싸울 것이다. 미국 혼자서도 일본을 대항하기에 넉넉할 터인데 황차 3국이리오. 그러므로 일본은 자멸하고 조선은 해방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준비해야 한다.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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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흘러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미군 공군 전투기들이 도쿄 시내를 공습하고 폭탄을 투하하는 모습을 본 여운형은 중일 전쟁 때부터 예견했던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고, 군부 쪽 고위 관료들의 요청으로 회담을 하였다. 특히 고노에 후미마로는 중일 전쟁 초기에 여운형의 제안을 거절한 바가 있었는데 국공합작이 전개되고 중국 전황이 매우 좋아짐과 동시에 일본 전황이 매우 나빠짐으로 여운형에게 중국 측 인사들을 설득하여 휴전 협상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여운형은 이미 늦었다며 거절하였다.

 

 

지난 4월 18일 미국 비행기의 동경 공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미국기의 성능은 일본기 성능보다 우수해 일본기가 미국기를 추적하지 못했다. 동경에서 미국 방송을 들으니 미국도 전쟁 준비에 광분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에 있게 될 것이며, 미·영이 승리하면 조선의 독립이 확실히 가능하고,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인데, 내 생각에는 일본의 물자 부족 때문에 뜻밖으로 빨리 종결될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이 미국과 함께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고, 나도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

여운형이 친구 오건영에게 전한 말, 사상휘보 속간 26호, 1943년

 

 

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두리틀 대원 공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27]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온 여운형은 도쿄에서 목격한 미군 공군 전투기들의 공습 상황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설명하였고, 일본 패망을 예언하는 말을 주변인들에게 흘렸다가 일본 헌병대에까지 귀에 들리게 되었다. 

 

1942년 12월 21일, 일본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로부터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길에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또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여운형을 다치게 하면 파장이 클 걸 염려하여 90시간 동안 잠을 못 자게 깨우는 고문을 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신경 쇠약에 걸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옥살이 중 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머리가 하얗게 셌으며 일제의 징병 부분에서 협력을 하지 않은 대가로 늘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1943년 7월 2일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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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6.

 

 

 미드웨이 해전

 

  위키백과

 

 

미드웨이 해전(영어: Battle of Midway)은 1942년 6월 4일부터 6월 7일까지 벌어진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진주만 공격이 있은 지 6개월 뒤, 그리고 산호해 해전이 있은 지 1달 뒤에 발생했다.[3][4][5] 

 

체스터 니미츠, 프랭크 잭 플레처,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가 이끄는 미국 해군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나구모 주이치, 곤도 노부타케가 이끄는 일본 제국 해군의 공격함대를 미드웨이 환초에서 격퇴하였고 일본군 함대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군사 역사학자인 존 키건은 미드웨이 해전을 "해전 역사상 가장 놀랍고 결정적인 타격"이라고 불렀고,[6] 해전 역사학자인 크레이그 사이먼즈는 미드웨이 해전을 "전술적으로 결정적이었고 전략적으로 영향을 남긴 살라미스, 트라팔가르, 쓰시마와 더불어 세계사에서 가장 중대한 해전 중 하나"라고 불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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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초기에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1942년 6월의 미드웨이(Midway) 해전의 패배를 계기로 전반적인 수세(守勢)에 몰리기 시작하였으며, 1943년에 들어와서는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고, 독일도 수세에 놓이게 되는 등 일·독·이 3국의 공동전쟁수행의 기본구상도 무너져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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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출

 

 

 

  1939    [    쇠주전자 유기그릇 등의 회수를 강제    ]

 

 

東亞日報 1939.1.24

 

 

總督府에서 1月부터 3月까지의 새로운 物資動員計劃이 수립된 바, 종래 廢品回收運動에서 강제동원으로 전환되다. 

 

작년에는 1戶1品運動을 위시하여 쇠부치를 모두 걷어드리고 솜 양털 냄비 가마솥 고무 신문지를 수집하였으며, 이를 위해 各郡에 蒐集組合이, 各道에 聯合組合이 조직되었었다. 今年에는 폐품수집과 물자사용제한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鐵 銅 羊毛의 動員計劃을 수립, 목도리 장갑 구두 버선 쇠주전자 유기그릇 등의 회수를 강제 하기로 되다.

 

 

 

 

 

 

每日新報 1941.6.1

 

 

이달 末에 파쇠·헌쇠를 回收하도록 朝鮮總督府에서 各道에 通牒이 발송되다.

 

 

 

 

 

每日新報  1942.9.29·30

 

 

京城府에서 一般家庭金屬類의 特別回收가 이날부터 11月 말까지 두 달에 걸쳐 실시되는 바, 回收對象金屬은 鐵·銅 각종 제품과 銅合金製 食器類 및 鐵·銅으로 만든 기둥과 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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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     日本在住  朝鮮人

 

 

 

[ ....  時局에 對하여 極히 冷淡한 態度를 示하고 있을 뿐아니라, 남몰래 帝國의 敗戰과 朝鮮의 獨立을 希하며 支那事變의 究極에 있어서는 日本은 國際的 孤立, 財政의 脆弱에 依해 드디어는 敗戰에 陷하며 日本帝國主義는 崩壞할 것이라 ....... 

 

...... 一擧에 朝鮮의 獨立을 實現하려고 劃策 .......   ]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2권  >   1940년 연도말  >   朝鮮總督府 警務局이 조사한 今年度

 

연월일 1940년   

 

출전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Ⅲ 713-717面

 

 

 

朝鮮總督府 警務局이 조사한 今年度 在日韓國人의 思想槪况은 다음과 같다.

 

 

一. 槪說

 

 

1940年末에 있어서의 日本在住 朝鮮人은 1,190,444名이다. 이를 昨年末에 있어서의 961,591名에 比하면 實로 1個年間에 228,813名의 激增을 示하고, 그 增加率의 急激함은 驚嘆에 値할 것이다. 그리고 本年은 昨年부터 계속하여 勞務動員計劃實施에 따라 日本에 있어서의 勞力不足을 補充하기 위해 募集에 의해 朝鮮人 勞動者를 日本으로 移住케 하기로 하고 右에 依해 本年度에 移住한 者는 38,171名이다. 이를 本年中에 있어서의 增加數 228,813名에서 控除해도 190,642名의 增加이며 例年의 增加率은 6萬 乃至 7萬인데 대해 約3倍半의 增加에 達한 狀况이다.

 

 

이를 보건대 支那事變에 伴하여 日本에 있어서의 勞力不足을 일으키고 더하여 重工業方面의 팽창을 招來한 탓으로 自然 朝鮮人 勞動者의 需要가 많아진 것과 他面 1939年 以降 朝鮮側에서 日本渡航證明書의 發給을 相當 緩和하게된 結果에 基因하는 것으로 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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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學生狀况

 

 

日本에 在學하는 朝鮮人 學生은 逐年增加하고 있으며 1940年末에 있어서의 在住朝鮮人 學生은 20,824名이다. 이에 小學兒童 129,513名을 加하면 150,337名이다.

 

이를 昨年末의 16,304名에 比하면 4,520名의 增加를 示하며, 또 1940年末에 있어서의 7,251名에 比하면 僅僅數年에 13,573名의 增加를 示하였다. 그리고 在住朝鮮人 學生은 그 半數 以上인 11,318名은 東京에 在學하고 大阪府의 3,054名, 京都府의 1,725名이 이에 버금한다. 又 이를 學校別로 觀하면 官立大學 261名, 私立大學 2,044名, 高等學校 又는 專門學校 3,624名, 中等學校 14,895名이다.

 

 

이와 같이 學에 志하고 鄕關을 出하여 日本에 渡來한 學生이 逐年增加함은 鮮內에 있어서의 德政普及에 伴하여 逐次 朝鮮人의 民度가 向上하여 그 向學心이 昂揚하고 있는 證左라 看되는 바이다.

 

그러나 이들 學生中에는 本籍地로부터 學費의 全額을 補給받지 못한 까닭에 渡來 便宜處에서 稼動하여 苦學하고 있는 者가 相當히 있다.

 

 

그리고 朝鮮人 學生은 授業料의 滯納으로 學校當局과의 사이에 問題를 起하고 또는 宿料不拂問題등을 生하여 或은 日本에 渡來한 것으로해서 갑자기 比較的 自由로운 生活을 許한 바 되어 自然 遊興에 耽하고 乃至는 日本人 婦女子와의 사이에 재미없는 風紀問題가 起하고 있다. 이리하여 學業 中途에 勞動者의 群에 投하고 或은 犯罪者 乃至 不良의 徒로 化하는 者가 相當히 있다. 甚한 것은 民族的 偏見을 挑發하여 思想運動에 狂奔하기에 이르는 등 이의 就學狀况은 總體的으로 觀하여 반드시 良好하다고는 認치 못하며 就中 彼等의 想思動向은 極히 注目할 것이 있다. 即, 彼等은 現下 朝鮮人의 生活狀態 其他 社會的 環境을 觀하고 所謂 直譯的으로 批判을 下하여 內鮮間에 甚한 差別이 있다고 論斷하여 필경 이는 朝鮮이 日本에 隷屬하는 까닭이라고 하며 敎育이 高度化하는데 伴하여 이러한 民族的 偏見은 더욱 拍車되는 것 같으며 將히 一部 民族急進分子 등은 執拗矯激한 策動을 逞하며 自己의 抱負를 朝鮮民族解放에 獻身할 것이라하여 所謂 救民的 英雄을 흉내내어 一般 在住學生에 대해 方途를 凝하여 그 啓蒙에 奔走하고 있다. 他面 一般 學生에 있어서는 積極的으로 斯種運動에 投하지 않으나 彼等의 策動에 依存하고 內心 其成就를 期待하며 觀望的 動向을 示하고 있는 것도 認되는 바이며 彼等의 策動에 대해 眞히 日本人의 觀念에서 이를 絶對的으로 排擊코자 하는 것 같은 動向은 極히 稀하다.

 

 

그리고 朝鮮人 學生의 思想運動의 胚胎하는 곳은 대개 各學校에 있어서의 朝鮮人學生留學生會이다. 從來 朝鮮人이 在學하는 學校에는 必히 朝鮮人學生의 團體가 있어 本年末에는 93團體, 會員 10,897名이다. 이 朝鮮人學生의 團體에서 彼等은 朝鮮人留學生會 或은 學友會 等의 名稱을 使用하고 있어 對日本的으로 마치 自己 等이 外國人인 것 같은 態度를 表示하고 있었다. 또 이들 學生團體는 從來부더 日本在住 朝鮮人의 民族主義 乃至 共產主義 等 思想運動의 源泉이 되고 있으며, 또 鮮內에 있어서의 思想運動에 對한 指導的 役割도 演하고 있는 바로서 가장 注目을 要하는 바이다.

 

 

今次 支那事變에 當하여도 在住朝鮮人 學生의 動向은 極히 寒心한 動向에 있다. 即, 彼等은 偏狹한 民族意識을 固執하고 時局에 對해 極히 冷淡한 態度를 持續하고 그 動向은 相當 容疑의 點이 있다. 事變下 朝鮮人의 思想 運動의 거의 全部가 學生層에 依해 策動되고 있는 實情이다. 이와같이 學生生徒의 思想動向이 재미없음은 彼等이 學校 卒業後 日本에서는 勿論 鮮內에서도 就職은 極히 困難한 것과 將來에 對한 希望을 갖지못하는 것 등이 큰 原因이 되고있는 것으로 認되는 바로서 將來 學生問題에 對하여는 相當 考究한 뒤에 適切한 對策을 樹立할 必要가 있는 것으로 思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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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思想運動의 狀况

 

 

朝鮮人의 思想運動은 民族主義, 共産主義, 無政府主義 等 一應 各種主義系統으로 別하는 策動을 表現하고 있으나, 그 基因하는 바는 대개, 潜在하는 民族意識에 温釀되어 所謂 民族的 反感에서 出發하는 것이며 이의 策動은 極히 執拗한 特異性을 持하였다.

 

 

그리고 日本在住 朝鮮人의 思想運動은 滿洲事變을 契機로 하여 1939年까지는 해마다 萎微衰退의 趨向을 걷고 있었으나 本年은 갑자기 活潑한 策動을 展開하는 바 있었다. 即, 이의 狀况을 檢擧人員에 就하여 觀컨대 1933年은 總檢擧人員 1,820名을 算하여 是를 最高로 하여 1934年은 884名, 1936年은 193名, 1938年은 117名, 1939年은 50名으로 해마다 遞減되었으나 本年은 165名을 算하며 昨年度의 3倍를 凌駕하였다.

 

 

由來 朝鮮人의 思想運動은 極히 執拗한 特異性이 있어 一面에서는 彼等은 所謂 事大思想에 基한 客觀情勢를 凝視하고 其의 如何에 따라 或은 蟄伏하고 或은 擡頭하는 等 巧히 其進出의 機를 窺하고 있는 實情이며, 特히 現時局下에서는 이의 動向은 前途 全히 閑却을 不許하는 것은 痛感하는 바이다.

 

 

本年中에 있어서의 在住朝鮮人의 思想運動을 槪觀하면 各種主義別 各各의 分野을 通해 相當 活潑化한 傾向을 示하며 그중 所謂 純然한 民族主義運動이 현저히 擡頭한 것은 注目할 必要가 있는 바이다. 또 이의 策動分子를 職業別로 觀컨대 檢擧人員 165名中 72名은 學生이며 思想運動의 大半은 學生層을 中心으로 하는 것이다. 即 朝鮮人學生層에 있어서는 事變發生 以來 極히 偏狹한 民族的 偏見下에 時局을 歪曲하는 見解를 採하고 時局에 對하여 極히 冷淡한 態度를 示하고 있을 뿐아니라, 남몰래 帝國의 敗戰과 朝鮮의 獨立을 希하며 支那事變의 究極에 있어서는 日本은 國際的 孤立, 財政의 脆弱에 依해 드디어는 敗戰에 陷하며 日本帝國主義는 崩壞할 것이라 하여 此機會에 一擧에 朝鮮의 獨立을 實現하려고 劃策하고 있다. 特히 本年은 各種經濟統制의 强化에 伴하여 物資의 需給에 不圓滑의 部面을 派生함과 乃至는 帝國의 國際關係의 復雜化 등의 事情에 對해 彼等은 이를 歪曲批判하여 위와 같은 見解를 더욱 信念化하기에 이른것 같고 그 策動은 현저히 活潑化한 바 있었다. 이들에 對하여는 嚴重한 警戒 取締를 加하였다.

 

 

2. 民族主義運動의 狀况

 

 

一. 槪說

 

 

朝鮮人의 民族主義運動은 極히 執拗하여 隨時 그 客觀情勢에 應하여 或은 擡頭하고 或은 蟄伏潜在하는 등 巧히 客觀情勢를 利用하고 又는 他運動에 便乘하여 策動을 持續하고 있는 實情으로 表面 好轉化하였다고 말하나 아직 樂觀을 難許하는 것이 있다. 即, 일찌기 滿洲事變의 勃發에 依해 當時 彼等은 我國力의 强大함을 直視하고 帝國信倚의 念 乃至 威服의 念을 抱하게 되어 그 對日感情은 一應 현저히 好轉된 것인양 認되었으나 마침 帝都反亂事件의 勃發을 보자, 帝國의 政治 中樞部에 動搖가 있다고 妄斷하고 그 信倚의 念에 些의 龜裂을 生케 된 것과 같이 갑자기 思想運動은 活氣를 呈하는 등의 事가 있었고, 또 今次 支那事變의 勃發에 依해 再次 帝國의 强大한 國力을 感得하고 一般 朝鮮人은 思想上 重大한 영향을 받아 이에 依해 皇民된 自覺을 一層 强하게한듯 一應 그 動向은 好轉을 示하고 民族主義運動에서도 一應 沈衰한 것 같이 認되었다.

 

 

그러나 學生層, 知識階層, 宗敎家方面에 있어서는 民族的 偏見을 固執하고 毫도 覺醒하지 않을 뿐 아니라, 支那事變을 觀望하고 남몰래 帝國의 敗戰과 朝鮮의 獨立을 希하고 各種劃策을 하고 있어 이의 動向은 相當 注意警戒의 必要가 있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本年에 있어서는 民族主義運動은 갑자기 活潑化를 加하고 愛知縣에서 檢擧한 「民族復興會事件」 警視廳에서 檢擧한「平安그룹事件」등과 같은 共産主義를 排擊하고 民族自決에 의한 獨立運動을 謳歌하고 있던 等 所謂 純然한 民族主義運動이 表面化한 것이 2, 3에 不止하는 狀况이다. 이를 要컨대 敍上과 같이 朝鮮人의 民族主義運動은 客觀情勢를 凝視하고 그 進出의 機를 窺偷하고 있는데 支那事變의 勃發에 依해 一應 沈衰하였으나 事變이 長期化하는데 件하여 特히 本年은 經濟統制에 伴하여 마침 諸物資配給의 不圓滑의 部面을 派生한 바 이를 觀察하고 이들 民族主義分子는 日本의 國力이 低下한 證左라 妄斷하고 事變過程에서 日本은 國內混亂을 招할 것이며 그 機會에 朝鮮獨立을 위해 蜂起할 것이라하여 今이야말로 朝鮮獨立을 위해 朝鮮民族은 自決하여야 한다고 모든 劃策을 推展하게 된 것으로 認되는 바이다.

그리고 本運動은 事變의 長期化에 伴하여 더욱 活潑化하기에 이르지 않나하는 趨向이 認되며 이의 査察警戒는 더욱 强化의 要있음을 痛感하였다.

 

 

 

 

 

 

 

 

 

 

 

          [     송진우 --- 민족불멸론   ]

 

 

[동아광장정윤재]  신나게 단군을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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