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3
| 김성수 2026.04.05 조회: 47751 |
露國饑饉(노국기근)은 엇지될가
1921.10.14 동아일보 1면
露國饑饉(노국기근)은 엇지될가 衣食(의식)의粮食(양식)으로 사는가 靈魂(영혼)의粮食(양식)으로사는가 北方寒地(북방한지)에 長蛇形(장사형)의 露西亞(노서아)는 洪水(홍수)를 經(경)한後(후)의 農圃幼苗(농포유...
露國救濟(노국구제)와 佛文豪(불문호)
1921.11.14 동아일보2면
露國救濟(노국구제)와 佛文豪(불문호) "노벨"賞金(상금)을 受(수)한 佛國文豪(불국문호)"아니트,프란스"氏(씨)는 右賞金三十萬法(우상김삼십만법)을 露國饑饉救濟(노국기근구제)에 寄附(기부)하기로 决定(결정)하...
米(미), 露饉救濟决議 (노근구제결의)
1921.12.23 동아일보 2면
米(미),露饉救濟决議(노근구제결의) 米國代議院(미국대의원)은 露國(노국)의 飢饉(기근)을 救濟(구제)키 爲(위)하야 大統領(대통령) "하딍"氏(씨)에게 二千萬弗支出(이천만불지출)을 許(허)할 法案(법안)을 通過(통...
東亞短評(동아단평)
1921.12.23 동아일보1면
(위)함인가 ◇露國(노국) 의 飢饉救濟(기근구제)를 爲(위)하야 米國(미국)은 四千萬圓支拂(사천만원지불)을 決定云 人道(결정운인도)를 爲(위)하야 一層奮發(일층분발)을 懇望(간망) ◇濠洲(호주) 의 一聯邦州政府(...
露國飢饉(노국기근)과 勞政府(노정부) 政情(정정)에는 影響(영향)이 無(무)하다고
1921.12.23 동아일보2면 정치기사(뉴스)
露國飢饉(노국기근)과 勞政府(노정부) 政情(정정)에는 影響(영향)이 無(무)하다고 "크라신"氏(씨)의 言明(언명) 露國全土(노국전토)에 亘(긍)하야 今年六月以來 大飢饉(금년육월이래대기근)에 迫(박)한 餓死者(아...
「레닌」氏의 新經濟策
신문명 | 동아일보
날짜 | 1922-01-04
露領見聞記(노령견문기) (四(사))
1922.01.22 동아일보1면
露領見聞記(노령견문기)(四(사)) 公(공) 民(민) 四(사),露國(노국)의大飢饉(대기근) 露國飢饉(노국기근)은 世界(세계)의 名物(명물)이 되얏나이다 空前(공전)의 大飢饉(대기근)이 全露西亞(전노서아)에 襲來(습...
東亞短評 (동아단평)
1922.01.30 동아일보1면
露國(노국)에는 又復饑饉(우복기근)의 襲來(습래)할 兆候(조후)가 顯著云 餓孚載道(현저운아부재도)에 人肉相食(인육상식)은 戰爭以上(전쟁이상)의 慘事(참사) ◇對英(대영) 平和(평화)가艱辛(간신)히成立(성립)된...
露國의 新經濟政策, 中央委員會에서 決定
신문명 | 동아일보
날짜 | 1924-02-19
露國飢饉救濟(노국기근구제) 活動寫眞(활동사진)
1922.02.20 동아일보 3면
露國飢饉救濟(노국기근구제) 活動寫眞(활동사진) 금야청년회에서 입장료는 일원식 노국(露國(노국))에서는 과격파운동이 이러난 이래로 사회가 동란을 이르키어 암흑한 공긔는 전국에 둘니고 더욱히 흉년이드러서 ...
露饑饉救濟企願 (노기근구제기원)
1922.02.27 동아일보 2면
露饑饉救濟企願(노기근구제기원) "칸터폐리"大僧正對英政府(대승정대영정부) "칸터테리"大僧正(대승정)은 英國(영국)이 國家(국가)로서 露國飢饉救濟(노국기근구제)로 寄附金(기부금)을 提供(제공)하기를 企願(...
全露共産黨大會, 新經濟政策의 失敗를 絶叫
신문명 | 동아일보
날짜 | 1922-08-25
民營銀行認可, 農勞의 新經濟策
신문명 | 동아일보
날짜 | 1922-12-14
露國의 新經濟組織
신문명 | 동아일보
날짜 | 1923-07-21
露國의 新經濟政策, 中央委員會에서 決定
신문명 | 동아일보
날짜 | 1924-02-19
1921.5. 상해파 고려공산당
1921.6.28. 자유시 참변
1921.7.23. 중국 공산당
1922.7.15. 일본 공산당
1923.1. 미국 하와이
[ ..... 自由樂地에서 생활함으로 氣像도 매우 활발하야 .......
일도 편하고 임금도 만하 1일을 노동하면 약 4, 5일 생활을 할 수 잇다 ....... ]
[ ..... 내가 今回 會議에 제안한 것은 4개가 有하니
1은 태평양연안에 신항로를 개통하야 仁川과 釜山에 직접 연락할 일이오.
2는 淸津, 元山, 釜山, 仁川, 鎭南浦 5항을 국제적 자유항으로 할 일이오. ......
조선생산물을 多大히 수출하야 ...... ]
汎太平洋商業會議에서 돌아와저
개벽 제31호 1923년 01월 01일
金潤洙氏 談
내가 京城을 출발하기는 10월 4일이오 「홀루루」에 도착하기는 同월 19일이올시다. 此 布哇諸島(其中 四島)에 산재한 우리 동포는 약 6,000여인에 달하는데 그네들은 오래동안 고국 형제를 그리다가 내가 今回 汎太平洋商業會議에 참석하랴고 渡米하얏다는 말을 듯고 모다 반가워할 뿐 야니라 특히 우리민족이 점차 국제적 무대에 활동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환영하야 여러가지로 재류동포의 뜨거운 사랑을 바덧습니다. 그네들로 말슴하면 고국을 떠날 때에 원래 금전도 업고 누구의 보호도 밧지 못하야 天涯孤域에서 遙遙히 고국산천을 바라며 悲哀의 눈물로 東西漂泊하다가 惡戰苦鬪한 결과 今에는 생활도 대개 상당히 하며 自由樂地에서 생활함으로 氣像도 매우 활발하야 백인에 손색할 것이 업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사업으로 말슴하면 民團學校敎堂報舘 등의 상당한 설비가 有하며 직업으로 말슴하면 10분의 7, 8은 노동이오 기타는 상업인데 노동이라도 본국의 노동과는 달라서 일도 편하고 임금도 만하 1일을 노동하면 약 4, 5일 생활을 할 수 잇다 하며 상업가도 1919년 이래로 특히 증가되어 今에 대상점이 20여호에 至하는데 그 중 安元奎씨라 하는 이는 朝鮮漿油製造業을 개시하야 前日에 독점적으로 하든 日本漿油營業者를 압도하고 재류동포 及 외국인에게 대대적으로 판매하는데 장래 희망이 多大하다 합니다.
내가 今回 會議에 제안한 것은 4개가 有하니
1은 태평양연안에 신항로를 개통하야 仁川과 釜山에 직접 연락할 일이오.
2는 淸津, 元山, 釜山, 仁川, 鎭南浦 5항을 국제적 자유항으로 할 일이오.<97>
3은 汎太平洋商業銀行을 설립하고 그 지점을 조선에 置하야 조선을 개발하는 사업에 투자 할 일이오.
4는 太平洋協會 內 特別委員會에서 인원을 派送하야 조선사정을 時時 조사케 할 일이올시다.
이상 4개 제안 중 제1 즉, 신항로 개시건은 만장일치로 채용하며 결의되엇고 제4 즉, 特別委員會에서 조선사정 조사의 건도 대개 동의되어 조선에 그 지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張斗鉉 씨가 이미 지부장으로까지 被選되엇습니다. 此 신항로 개시로 말하면 우리 조선 무역계에 일대행복이라 할 수 잇스나 다만 염려되는 바는 도착하는 物貨를 능히 조선에서 흡수하며 또한 조선생산물을 多大히 수출하야 조선에 來하는 영업자로 하야금 손해가 無하야 계속적으로 航行하게 될지 의문이올시다.
爲先 來 1월 중에 加州 무역가의 상선이 도착할 듯 하온데 대단 念慮處이올시다. 이것은 1인의 力으로 도저히 할 수 업고 우리 조선 실업가 기타 일반 사회의 협동이 아니면 곤란할 줄로 압니다.
내가 미국 本洲로 향하기는 11월 8일이고 桑港에 도착하기는 同월 15일 이올시다. 此 桑港은 미주 대륙의 관문인 고로 紐育이나 市俄古만은 좀 못하다 할지라도 시가의 번화와 건축의 宏大는 실로 可驚할만 합니다. 布哇는 적도 부근지인 고로 四時로 농업을 하고 기후가 평균 90도 내지 80도나 此 桑港은 조선과 기후가 약 相似하고 다만 건축물이 宏高함으로 오전 11시 이후가 아니면 시가에서는 일광을 볼 수가 업습니다. 此地에도 재류동포가 160여인이나 되는데 또한 民團敎堂 등의 설비가 有하며 民團의 주최로 多大한 환영을 바닷습니다. 그리고 기타의 商業會議所 인도로 各處를 상세히 시찰하얏고 加洲大學도 구경하얏습니다. 此 대학은 학생이 약 13,000여명인데 남녀가 苦學을 하고 잇는데 그 중에 우리 동포도 2인이 잇는 것을 보고 퍽 반가왓습니다.
최후에 말슴할 것은 미국여자계에 근래 풍조가 격변하는 事인데 물론 미국은 남녀동등의 權이 有함으로 여자의 활동은 可驚할 者가 多하고 從하야 弊風도 多한 중 특히 近日에는 여자의 奢가 심하고 십중 칠팔은 남자와 如히 단발을 하며 하의를 短케 합니다. 此風이 과연 조선에도 유행할지 아니할지 不知하거니와 米人 識者 간에는 매우 여자계의 前途를 우려하는 모양입듸다. (壬戌 12월 26일)
1923.6. 하와이 동포 임금 등 생활
[ ...... 移哇同胞들은 該地의 生活이 安易하야 普通收入으로도 過히 困難치 안흔 生活을 하게 됨으로 衣之食之가 豊美하며 住宅은 大槪 輕便的이다. ........
一般 砂糖耕作地 勞働者의 賃金制度는 .... 男子 月額給料 52圓, 女子 39圓을 基礎賃銀으로 하고 ....... ]
「하와이」에 사는 六千同胞의 實況
개벽 제36호 1923년 06월 01일
一記者調
「하와이」에 잇는 同胞의 狀況은 朝鮮 內地 또는 米洲 以外에 外地에 잇는 兄弟의 恒時 得聞코져 하는 바이며 尙又 今回 「하와이」同胞中 一團의 故國 訪問의 消息이 傳하매 一般은 더욱이나 그곳의 事情을 알고 십허 한다. 우리 亦是 그곳의 事情을 詳知치 못함을 遺憾으로 생각하나 먼져 昨年 現在에 依한 調査의 一部를 公開하야 讀者의 叅考에 供한다.
一. 人口
布哇에 在留하는 我同胞의 渡洋은 1904年 移民時로 爲始하야 該年에 移住한 同胞數가 2,435人이엿고 其 後 滿 5個年間에는 其 數가 殆히 倍에 達하엿나니 1920年度에 行한 米國의 國勢 調査에 依하면 其 數가 4,950人이엿스며 再昨年度 卽 1921年 6月末에 至하야는 5,327人으로 推算케 되엿섯다.
...................................................................................................
四. 生活狀態
移哇同胞들은 該地의 生活이 安易하야 普通收入으로도 過히 困難치 안흔 生活을 하게 됨으로 衣之食之가 豊美하며 住宅은 大槪 輕便的이다.
同胞中에 實業에 從事하야 店餔를 自營하는 이는 少數이며 擧皆는 米人商賈에 使傭이 되여 月給生活을 하고 其 外는 全部 勞働者인데 今에 호놀눌누 及 各島에 2,000圓 以上의 資本金으로써 獨力 經營하고 잇는 商店을 擧하면 左와 如하다.<33>
勞働同胞의 多數는 砂糖耕作에 從事하는데 再昨年 6月末 調査에 依하면 1,208人이고 其 內譯은 如左
此 外에도 鳳梨耕作, 珈琲栽培, 米人家庭奉公(Yard boy, Weeder, Book) 埠頭人夫 及 其他의 雜役에 就働하는 者 約 1,500人이 된다.
一般 砂糖耕作地 勞働者의 賃金制度는 再昨年 11月부터 改正되야 男子 月額給料 52圓, 女子 39圓을 基礎賃銀으로 하고 男子는 1個月 23日以上, 女子는 15日以上 의 就働者에 對하야 勤勞獎顧金이라고 砂糖時勢의 何如에 不拘하고 每月 收得에 對한 1割을 給하고 『또 뽀-나쓰』(Boonas) 卽 基準 糖價를 1噸에 平均 200圓이라고 하면 200圓 時勢에는 5分, 200圓 以上은 每 2圓에 5厘, 200圓 超過時는 40圓에 對하야 1割의(뽀-나쓰)利益配當獎勵金을 給與하기로 되엿다.
............................................................................................................................
동아일보 1923-11-27
산보에까지 이용된다는
미국의 자동차
집집마다 설비한 미국의 자동차
산보하는데 공원에까지 타고 가
그 반면에 치어 죽는 사람이 만타
자동차 만키로 세계에 유명한 미국에 자동차가 얼마나 만흐며 따라서 엇더한 리익과 해가 잇는지 한번 알아 볼만한 일이다. 왼만한 미국 사람의 집에 자가용 자동차 한채씩 업는 집이 업다. 쏠쏠한 월급쟁이는 물론이요 심지어 밥이나 벌어먹는 로동자까지도 공장에 가는 길에 자동차를 타고 간다. 이가치 자동차가 흔하게 되엿스니 자연 자동차 갑도 물론 쌀 것이다. 뉴욕 방면에서는 자동차 한 채에 보통 사백불(팔백여 동원) 가량이라 한다.
..................................................................................
상급학교 다니는 대학생들도 자동차를 제손으로 운전하면서 학교에 다닌다. 뉴욕 뎡거장이나 연극장이나 공원 문 압 가튼 사람 만히 모히는 곳에는 수만채의 운뎐수 업는 자동차가 주인을 기다리고 서잇다.
................................................................................................................
https://db.history.go.kr/common/imageViewer.do?levelId=npda_1923_11_27_v0003_0560
1930
[ ...... 朝鮮에는 아직 자동차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잇지만 米國에서는 全人口와 자동차의 數가 거운 가터저 가는 중이요 .........
米國 26,300,000 日本 75,000
獨逸 550,000 朝鮮 3,000
自動車 王國의 米國
쩍하면 입맛이라고 돈하고 자동차라면 미국이다. ......... ]
自動車 黃金時代
별건곤 제26호 1930년 02월 01일
自動車 黃金時代
自動車... ...自動車
현대의 메카니슴이 나은 高速度의 문명 그 중에도 꼿다운 성능을 발휘하고 잇는 비행기와 자동차. 朝鮮에는 아직 자동차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잇지만 米國에서는 全人口와 자동차의 數가 거운 가터저 가는 중이요 어느 도시는 이미 인구보담 자동차가 만허젓다는 소식까지 들닌다.
사람이 만들어내인 기계에게 도리혀 사람이 지배를 밧게 되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그러면 그 자동차의 數는 얼마나 되는가
全世界의 自動車
지금으로부터 13년 전까지는 전 세계의 자동차 수가 423만 臺밧게는 더 업섯다. 그 뒤로 차차 늘어서 1928년 말까지에는 실로 3200만 臺에 달하엿다. 이에 과거 십 년간의 增加率을 보면 다음과 갓다.
...............................................................................................
이상의 表로 보건대 增加의 數는 실로 연평균 2백만 臺에 달하여 잇다.
다음에 以上의 數의 자동차를 國籍別로 보면 다음과 갓다.
米國 26,300,000 墺地利 502,000
英國 1,370,000 亞爾然丁 310,000
佛蘭西 1,110,000 伊太利 180,000
카나타 1,100,000 日本 75,000
獨逸 550,000 朝鮮 3,000
.................................................................................................
自動車 王國의 米國
쩍하면 입맛이라고 돈하고 자동차라면 미국이다.
과연 미국은 자동차로써도 세계에 君臨하고 잇다.
......................................................................................................
다시 자동차 一臺에 대한 각국의 人數를 보면 다음과 갓다.
米國 4.9人 울과이 42.0人
하와이 6.0人 瑞典 47.0人
카나다 9.0人 日本 1.500人
新西蘭 9.3人 土耳其 2.516人
墺地利 12.0人 波斯 1.968人
뿔가리아 2.147人
米國 自動車 生産數
1895 4臺
1897 100臺
1898 1,000臺
1901 7,000臺
1905 24,550臺
1910 181,000臺
1915 895,930臺
1920 1,905,560臺
1925 3,317,586臺
1928 4,601,130臺
즉 再昨年度에 460만 臺 昨年度 上半期에 320만 臺를 생산하엿다. 그 중 種別로 하여 보면 乘用車가 4,024,590臺요 貨物車가 576,540臺이다.
그 중에 해외로 수출한 數는 825,113臺이니 즉 전 세계 자동차 生産高의 83.3%를 占領하고 잇다.
米國의 自動車 登錄臺數
1895 4臺
1897 90臺
1898 800臺
1901 14,800臺
1905 77,400臺
1910 458,500臺
1915 2,309,666臺
1920 8,225,859臺
1925 111,512,638臺
1928 24,493,124臺
이상의 통계를 보건대 1897년으로 1910년까지에 미국의 자동차 生産數보담도 登錄數가 만흐니 즉 그 때까지는 生産國이 아니요 歐洲로부터 수입하엿섯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미국이 자동차 왕국이 된 것은 최근 20년간의 일이다.
....................................................................................................................
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
1923.3. 이승만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동아시아의 반공주의
입력 2023.06.08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이승만은 자신이 하와이에서 발행하던 ‘태평양잡지’에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글을 게재했다(1923년 3월호). 당시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이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희망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 지식인들도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 비판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먼저 양반, 상놈 하는 신분제가 없어진 자리를 자본가-노동자 간의 빈부격차가 대신해버린 세태를 비판하며, 공산주의의 평등 주장을 일단 평가했다. 그러나 재산을 나눠 갖게 되면 소수의 부지런한 사람이 다수의 게으른 사람을 먹여 살리게 될 것이고, 자본가를 없애버리면 혁신과 진보는 중지될 것이며, 보통 사람의 학식을 높여 지식인과 대등하게 만들어야지 지식인을 아예 없애자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등의 이유를 대며 공산주의의 부당성을 갈파했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며 공산주의자와 소련을 경계했다(한표욱, 이승만과 한미외교). 그의 반공주의는 철두철미하여 해방 후 정국을 주도할 때는 “공산주의자들은 콜레라와 같다”(방송연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고 했고, 미국인들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투쟁에 있어서는 중립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훈계()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 대해 온건했던 하지 미군정 사령관이나 미국 국무부와 자주 갈등을 빚었다.
.............................................................................................................................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6080300025
* 1924.1.1. 동아일보 「새봄을 當하야」
[ ...... 가튼 朝鮮人間의 계급적 대립을 보게함은 策의 可한 者아니라. 朝鮮人은 위선 대동단결 ..... 위선 ... 朝鮮민중의 실생활 조건을 향상케 함이 가하다 ..... 경제는 진화하는 것이오. 躐等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은 조건이 잇서야 되는 것이오. .... 절급한 것은 朝鮮人 자체의 생산력 발전을 기도하는 一事 ......... ]
개벽 제43호
1924년 01월 01일
皆自新乎 - 最近一年中의 社會相
新元劈頭의 新事端續出
大正 9년 以降, 은근히 朝鮮社會에 세력을 가진 엇던 新來의 사회주의가 大正 12년인 작년에 이르러는, 아조 깨즛하게 머리를 들어 내엿다. 신년벽두의 제1일에는, CC당의 일홈으로 사회혁명 만세의 불온 연하장이 서울 안에 퍼지여, 관민의 눈이 다-가티 휘둥굴엇스며, 4일에 國一館에서 열닌 紳士給의 新年懇親會席上에 고학생 一群의 노호가 잇고, 8일에 주간 新生活이 발행 금지를 당하며, 仍해서 16일에는 「新生活」사건에 관계된 朴熙道, 金明植, 辛日鎔, 兪鎭熙, 자유노동자 조합사건에 관계된 李時雨, 金思民등에 대한 판결 언도가 잇서,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는 극도도 성행되엿다.
............................................................................................................
注目되는 東亞日報의 論調
사회주의의 사조가 경향을 통하야 불니듯이 일어나는 이 때에, 朝鮮에 유일한 언론기관인 東亞日報는 이에 대한 정면으로의 사회혁명 불가론을 제창하엿다. 신년 제1호의 「새봄을 當하야」의 사설에, 朝鮮人은 정치적 파멸로부터 다시 경제적 파멸에 드러간다는 말을 하고, 다시 「이를 구제키 위하야는 혹은 정치혁명을 주장하고, 혹은 사회혁명을 주장하나, 徒히 계급의식을 고취하야, 가튼 朝鮮人間의 계급적 대립을 보게함은 策의 可한 者아니라. 朝鮮人은 위선 대동단결하되, 어느 정도까지의 유 무산자 兩級의 타협을 도하고, 위선 할 일로서는, 각양의 문화적 노력에 의하야 朝鮮민중의 실생활 조건을 향상케 함이 가하다하고, 尙 又 제2일의 사설에는 논조를 또 한 번 나위여, 「경제는 진화하는 것이오. 躐等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은 조건이 잇서야 되는 것이오. 결코 조건이 업시는 되는 것이 아니라 하야, 생산력이 발달치 못한 朝鮮에는 도저히 무산자 사회의 現出을 기할 수가 업다고 논단하고 다못 절급한 것은 朝鮮人 자체의 생산력 발전을 기도하는 一事라 하엿다.
東亞日報의 이러한 주장은 일부 중산급 이상의 편에서는<131> 물론 환영하엿스나, 신진주의자를 위시한 대다수의 민중은 날이 감을 따라서 점차 이를 반대하게 되엿다. 심한 자는 東亞日報로써 朝鮮에 대한 白色運動의 前衛라고 말하기 까지에 니르럿다.(이상 1월)
....................................................................................................................................
* 1925
[ 韓國人工場 2,005個, 生産品價額 69,226,754圓 從業者 韓國人 70,281人
日本人工場 2,085個, 生産額價額 226,902,112圓 從業者 日本人 6,363人 ]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25年度 第8編 第110表
1925年末 現在 工場數는 4,238個, 資本金 265,853,369圓, 從業者 80,375人(韓國人 70,281人, 日本人 6,363人, 其他外國人 3,731人), 原動力은 機關數 2,370, 馬力數 123,949, 生産品價額 337,249,418圓인바 이를 다시 官公署 및 內外國人別로 보면 官公署工場 70個, 生産品價額 36,941,480圓, 韓國人工場 2,005個, 生産品價額 69,226,754圓, 日本人工場 2,085個, 生産額價額 226,902,112圓, 中國人工場 72個 生産品價額 1,042,961圓, 其他外國人工場 6個, 生産品價額 3,136,111圓이다.
**
1936년
[ 工場數 5,927 職工數 148,977人 工場生産額 709,866,000圓 ]
六. 工業
○ 工場 : 年末의 現在 工場數는 5,927인데 前年에 比해 292(5.2%)가 增加하였다. 工場을 大別하면 食料品工業이 2,258로 가장 많아 額數의 38.1%를 占하고, 化學工業이 1,425(24.0%)로 그 다음이며 그밖에는 훨씬 내려와서 紡織工業이 402, 機械器具工業·窯業이 300臺, 金屬工業·製材 및 製品工業·印刷 및 製本業이 200臺, 가스 및 電氣業이 50, 其他工業이 260이다.
......................................................................................
工業의 職工數는 148,977人인데 前年에 비해 13,002人(9.6%)이 增加하였다. 職工은 化學工業의 41,972人의 最多로 總人員의 28.2%를 점하고 紡織工業 33,830人(22.7%), 食料品工業 32,617人(21.9%)이 많은 편이다. 그밖에는 훨씬 내려와서 窯業 8,269人, 機械器具工業 7,939人, 金屬工業·印刷 및 製本業이 각각 6,000人臺, 製材 및 木製品工業이 4,906人, 가스 및 電氣業 812人, 其他工業이 5,394人이다.
職工中 男工은 98,249人(66.0%), 女工은 50,550人(34.0人)인데 紡織工業 發達과 함께 점차 女工의 比率이 높이지고 있다.
........................................................................................
今年度의 工場生産額은 709,866,000圓인데 前年에 비해 7,552,000圓(11.9%)이 增加하였다. 生産額을 大別해 보면 食料品工業이 320,580,000圓으로 가장 많아 總額의 45.2%를 점하고 化學工業은 162,462,000圓(22.9%), 紡織工業은 90,378,000圓(12.7%), 가스 및 電氣業은 39,989,000圓(5.6%), 金屬工業은 28,366,000圓(4.0%)으로 많은 편이다. 그밖에는 훨씬 내려와서 窯業·製材 및 木製品工業은 19,000,000圓臺, 印刷 및 製本業은 12,427,000圓, 機械器具工業은 7,399,000圓, 其他工業은 10,003,000圓이다.
...............................................................................................................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1권 > 1936년 연도말 > 六. 工業
1937 장덕수
[ ..... 「콤뮤니즘」도 또는 「팟씨즘」도 모다 독재주의 ....... ]
삼천리 제9권 제4호
1937년 05월 01일
張德秀氏의 「博士論文」, 「산업평화의 영국적 방법」과 그 학문적 가치
印貞植
........................................................................................................................
이리하야 다시 씨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규정에로 달려가서 그의 진실한 목적은- 『사회의 어떠한 成員도 총족하고 자유스러운 생활을 생활하기 위한 기회를 否定當하지 안는 데 있다 라는 고래의 진부한 명제를 인용한 후 다시 이 기회를 획득하기 위하야는 『근세 민주주의는 그럼으로 각 개인의 지위와 그의 고유한 권리가 정부에로의 참여와 선거제 자유비평 등을 통하야 보장되는 것인데 실로 그가 행복되고 문명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이리하야 그의 동포들의 동등한 요구와의 조화 밋헤서만 최대한도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p.15)
그러나 暫間 머리를 돌려라. 이러한 정치적 평등이 아무리 자유롭게 만인에게 보장된다 할지라도 경제상의 분열이 의연히 지속되고 있는 곳에 과연 「각 개인의 행복되고 문명된 생활」과 『그의 동포들의 요구와의 동등한 조화』 등이 실현될 수 있단 말인가.
16, 17세기에 있어서 영국의 신사들이 떠들고 단니든 민주주의의 이 따위 환상을 「히틀러-」와 「뭇소리니」와 같은 인간들이 몽둥이를 메고 단니는 오날 이 시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되푸리한다는 것은 세상 물정에 대한 완전한 무지의 표시가 아닐까 한다.(중략-원문)
씨는 다시 민주주의와 「콤뮤니즘」 또는 「파씨즘」과의 차이점의 규명에로 전진하엿다. 이리하야 이「콤뮤니즘」도 또는 「팟씨즘」도 모다 독재주의(Dictatorshiq)라는 것을 말한 후 「이 독재주의라는 것은 그것이 이태리판이건 또는 露西亞판이건 모다 한길가치 상부로부터 課要되여 자기 자신을 통제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 민중의 가정된 행복을 위하야 정부로부터 강제되는 명령과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간단하게 설명한다.
이 兩個의 독재형태를 이처럼 형이상학적으로 조잡하게 혼동하여버린 후 이 소위 「독재」(Dictatorshiiq)에 대한 영국적 「데모크라씨」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하야 씨의 논지는 다시 다음과 가치 전개된다.
『대영제국에서 실천되고 있는 것과 같은 「데모크라씨」의 근본적 원칙은 곳 관용성(tolerance)에 있다. 통일과 질서는 사회생활의 의상을 단일한 제복에로 재단하는 국가의 전능한 權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로 數多한 각양의 형태의 각종 사회적 시설을 거처서 나타나는 일반 영국 신민의 심오한 정신적 또는 사회적 성격의 표현을 통해서 달성되는 것이다.
다양성과 屈伸性은 사회 정의의 동요하는 균형의 일층 심각한 통일과 질서에 대응하는 자유의 兩個 특징이 된다. 「데모크라씨」의 이러한 諸특징은 산업평화의 영국적 企圖에 있어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 첫재로 그것은 분쟁의 해결에 적용될 직접적 방법을 규정하는 것이며 둘재로는 산업상의 현존 질서 그 자체로 하여금 산업 민주주의의 광범한 기초에로 향하야 서서하게 그러나 무저항적으로 움지기여 나아가게 하는 정신을 공급하는 것으로 산업평화와 사회보장에 대한 정부의 책임은 이에 따라서 더욱 증가되여 나아간다.
그럼으로 그 기술도 또 그 정신도 모다 영국적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이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요컨데 그들의 산업 평화의 諸방법에 대하여 특수한 異彩를 부여하는 자는 산업상의 諸관계의 특수한 분야에 있어서 적용되여 있는 일반 영국 민중의 태도와 기질 그것이다』(p.15-16)
...........................................................................................................................
개벽 신간 제4호
1935년 03월 01일
朝鮮 民間新聞界 總評
黃泰旭
.......................................................................................
民間 三新聞의 誕生과 其 經路
그때는 일반적으로 민족주의의 사상이 고조되엇든 때임으로 齋藤總督은 당시 각 방면의 말을 균등히 듣는다는 의미로 민족주의 편으로 李相協에게 東亞日報 親日本主義 閔元植에게 時事新聞, 당시 日鮮同化에 힘쓰는 단체라는 大正親睦會芮宗錫에게 朝鮮日報를 허가하야 각각 상응 발달을 하며 성장하는 것을 보려 하엿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로는 朝鮮과 시사는 완전히 東亞에게 압도된 감이 잇섯고 더욱 時事新聞만은 몃 달 못되어 外로 민중의 지지가 없고 안으로 재정난이 잇서 폐간되고 그 후로 朝鮮日報도 일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엇섯다.
그러나 東亞日報도 창간이래 聲勢만 놉핫슬 뿐이지 경영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엇다. 年少氣壯한 논객들이 東亞日報를 중심으로 盛히두르는 論鋒은 총독부의 근본 방침에 저촉된 바- 만아 필경 정간의 액을 당하엿섯고 그것이 해금되는 동시에 不幾月에 金性洙가 중심으로 주식회사가 완성하야 제1대 사장으로 宋鎭禹가 취임하엿다.
이 동안에 朝鮮日報는 大正親睦會의 손에서 宋秉畯에게로 넘어가서 그가 사장의 지위에 잇섯스나 실제의 사장은 南宮薰씨가 대행하엿섯다. 南宮씨는 東亞의 신예에 비하야 斯界의 노장인 감이 잇섯스나 아모래도 그때의 朝鮮日報<14> 聲勢는 東亞에 미급한 점이 잇서 보엿다. 南宮씨는 이 중에 회사 성립에 노력하고 잇섯다.
....................................................................................................
안에서 총독부 탄압 견디며 자주역량 마련
......................................................................................................................
인촌의 독립운동은 직접적인 운동과 간접적인 운동으로 나누어진다. 직접적인 운동은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준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간접적인 운동은 교육, 산업, 언론을 일으킴으로써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중앙학교 숙직실은 새로 지은 교사 앞 운동장 동남 편에 있었다. 기당(幾堂) 현상윤(玄相允)이 1916년에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인촌의 부름을 받고 중앙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은 숙직실에서 침식을 같이 하면서 학교일을 상의하고 민족의 장래를 설계했다.
1918년에 독일이 항복으로 1차 대전이 종료됨과 더불어 6월에 열린 베르사유 회담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들고 나온다. 이러한 제창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지도자들의 독립에 대한 의식을 더욱 제고시켰고 국내에서도 일본의 무단정치에 시달리던 국내 각계 지도자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고취했다.
인촌, 고하, 기당 등의 중앙학교 팀도 이러한 분위기에 젖어서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숙의에 숙의를 거듭하게 된다.
여러 기관별로 독립운동에 대한 숙의가 일어났지만 그것은 실천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 그러한 의식과 숙의를 결집시켜 행동으로 옮기는 데 중앙학교의 3인방 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천도교, 기독교, 동경유학생들, 학생단체 등이 서로가 만나게 하고 연결시켜 주고, 한데 모여서 합의를 도출케 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 중앙학교 팀이 중심적 역할을 하고, 모의장소도 주로 숙직실이나 사택 또는 인촌의 가택이었다.
이 무렵 동경에서 2·8운동을 주도하던 백관수는 송계백에게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중앙학교 숙직실로 인촌, 고하, 기당을 찾아가도록 한다. 이들은 최남선을 불러 독립선언서를 읽어보도록 한다. 최남선은 감격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는 활자 보따리를 내주고 송계백에게 동경으로 가져가게 한다. 이때 인촌은 송계백에게 넉넉한 여비를 마련하여 준다.
인촌은 기왕 독립운동을 벌이려면 전국 방방곡곡의 백성들과 더불어 각계각층 지도자들을 전부 동원해서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천도교의 손병희 이외에 민족의 대표자들로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한규설, 윤용구 등을 설득해서 합류시키기로 한다. 설득작업은 주로 고하와 육당이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거절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에 적극적이던 최린과 최남선마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때 인촌은 종교단체가 천도교만 있는 게 아니고 기독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기당(幾堂)으로 하여금 기독교계의 원로 지도자이자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을 교섭토록 한다. 기당은 이승훈과 동향인 김도태를 만나 이승훈으로 하여금 이 운동에 참가하도록 진지하게 부탁한다. 김도태는 정주에 내려가 이승훈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런데 같은 날 같이 일으키자고 한 동경 유학생 측에서 2월 8일에 거사했다는 연락이 왔다. 초조와 불안 속에 있던 중 드디어 1919년 2월 11일 이승훈이 인촌 집으로 찾아오게 된다. 남강도 이미 2·8독립선언을 알고 어린 학생들까지 독립운동을 외치는데 국내에서 가만히만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다짐한다. 남강은 기독교계에는 감리교파와 장로교파가 있는데 이 두 파가 합치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하며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20대의 젊은이들을 안심시킨다. 이때 인촌은 활동자금으로 수천 원의 돈을 내놓았다.
기독교 단체로만 거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중앙학교 숙직실 팀은 몸이 달았다. 우선 이렇게 되면 거국적인 운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하는 이승훈을 찾아가 천도교와 같이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다급해진 고하는 육당 최남선을 찾아가 사정을 알리자 육당은 남강, 고하, 기당과 같이 최린의 집을 찾아 간다. 여기서 우여곡절을 거쳐 비로소 기독교와 천도교가 연합전선을 펼치면서 구체적인 거사계획과 방법을 숙의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최린, 이승훈, 함태영 세 사람이 불교단체에도 참가할 것을 권유함으로써 한용운과 백용성이 합류하게 된다.
인촌이 이러한 모의과정에서 처음부터 일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않을까를 걱정하던 것을 이 모임에 참여한 이병헌의 기록을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당시 인촌이 이야기한 내용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사(百事)에 유시(有始)면 유종(有終)이니 초지를 관철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면 성실 정려(精勵) 근면해야 하고 백절불굴의 일심으로 임사무의(臨事無疑)하며 물위심급(勿爲心急)하고 의리를 존중하고 친우 간에 신의를 잃지 말아야 한다. - 이병헌 “내가 본 3·1운동의 일 단면”
위의 글은 인촌의 평소 생활과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는데 그 끝을 보려면 성실하고 정성을 기울여야 하고 백절불굴의 마음가짐으로 일단 일에 착수하면 의심하지 말고 일하는 사람끼리 신의를 생명처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인촌의 실천에 대한 강한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운동에 찬성과 더불어 참여한다고 말은 하여 놓고 나중에 소극적이고 회피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심정도 담겨져 있다. 여기서 인촌의 실천의지가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인촌의 후속사업인 동아일보, 경성방직, 보성전문 등에도 3·1정신이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훗날 경성방직이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인촌은 3·1정신을 생각해서라도 경성방직은 문을 닫을 수 없다고 주위 사람들을 격려하게 된다. 중앙학교는 3·1운동 후에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예컨대 3월 5일에 서울역전 광장에서 전개된 제2차 학생운동에도 전교생이 참가하였고 1926년의 6·10 만세운동에서도 중앙학교 5학년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1 동아미디어센터 인촌기념회
httpwww.inchonmemorial.co.krhtmlinchonm_inchon_think5.html
삼천리 제10호
1930년 11월 01일
朝鮮 大財閥 總解剖(一), 金性洙系의 500萬圓, 事業體系=京城紡績, 京城商工, 海東銀行, 東亞日報, 中央學校
朝鮮 大財閥 總解剖
柳光烈
朝鮮에서 자못 近代式으로 事業을 버리인 財産家가 잇다면 누구든지 人村 金性洙氏를 첫 손에 곱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學校로 新聞社로 紡績會社로 여러 가지 事業에 손을 내밀어 朝鮮經濟界에 한 王國을 세운 金性洙氏는 全南 扶安 茁浦의 한 地主의 아들이다. 封建的 春睡가 方濃한 中 더욱 急激한 外來資本이 들어와서 朝鮮의 産業革命을 밀고 나갈 때에 모든 封建的 蓄積인 地主가 漠然히 그 所措를 알지 못하고 枕을 列하야 넘어지면서 그 蓄積한 財産의 正比例로 蓄妾과 遊蕩을 일삼을 때에 微弱하나마 外來資本家와 相對하야 一矢를 應酬하는 것이 金氏外 幾人뿐이다. 氏는 地主의 아들로 오래 家庭에서 舊學에 힘썻고 느께야 芨을 負하고 東京에 渡하야 早稻田學窓에 螢雪의 功을 싸흐니 當時 20內外의 多感하든 氏는 滿目荒凉한 故國을 돌아보며 時時로 深慮에 잠기고 感情에 激하엿섯다. 學業을 마치고 그의 平生莫逆인 安鎭禹氏와 歸國하니 一妙小한 25,6歲의 靑年이며 歸國하자 곳 着手한 것이 敎育界이니 그것이 現在 中央學校이다.
中央高等普通學校
兩氏가 京城에 돌아오자 곳 自由學校를 經營키로 하여 그 設立願을 當時 尖頭總督 寺內氏에게 提出하엿스나 그때는 日韓倂合된지 얼마 안되여 私學에 대하야는 警戒할 때이며 몃개 잇는 私學도 財政難 其他로 一種 受難時代이엿다. 學校認可가 容易히 되지 못한 것을 본 兩氏는 그때 몹시 財政難에 빠지엇던 中央學校를 引繼하게 되엿다. 中央學校는 前畿潮學校 後身이니 一時 熱血志士의 손으로 校運이 隆盛하엿스나 一陣霜風에 萬華가 俱하듯이 或은 亡命 或은 慴伏하고 經營이 困難케 되엿섯다. 兩氏가 이를 引繼는 하엿스나 元來 靑年이라 巨大한 財政을 投함에는 父兄의 承諾을 엇지 아느면 안되게 되엿다.
守成에 長한 父兄이 뉘-巨萬의 大金을 投하야 不生産的 學校를 經營하는데 질겁게 許諾하리요. 이에 金氏는 몃칠 조르다 못하야 畢竟 最後的으로<24> 身命을 睹하며 待命하엿다. 븨인房에 門을 疊疊히 닷고 몃칠을 굶으며 自殺할 뜻을 보이엿다. 그의 父親은 體面上으로라도 가만히 잇서 버틔여 보앗스나 慈愛깁흔 그 母親은 『미음』그릇을 들고 감긴 門고리에 매달리여 『성수야-』를 連呼하며 盡日 痛哭하야 집안은 亂家가 되엿섯다 한다.
이리하야 承諾을 어든 氏는 松林이 鬱蒼한 現桂山에 校舍建築을 計劃하고 또 父親 압헤 가서 數日을 痛諫하야 8萬圓의 巨額을 어더 新築하엿다. 以來 春風秋雨 十餘星霜에 數千의 英俊을 社會에 보내고 7,8百의 健兒가 校庭에 뛰게 되엿다.
이 靑年敎育家 金氏가 經營하는 中央學校에는 海外에서 돌아온 敎育家들이 만이 모히여 一時는 新思想 鼓吹의 叢林이 되엿섯다. 年前에 30萬圓의 財團法人을 만들어 萬年不敗의 基礎가 完成하엿다.
東亞日報社
東亞日報社는 株式會社이라. 氏의 單獨事業이라 할 수는 업스나 現在 70萬圓 株式會社에 그 株數過半이 金氏의 一門 또는 姻戚, 同志의 所有이니 氏의 事業이라 하여도 過言이 아니다. 己未年 三一運動이 朝鮮의 山河를 震憾한 後 10年緎日하엿던 朝鮮의 言論界는 길고 긴 冬眠期를 지나 一陽來復의 春光을 보게 되엿다. 言論界의 元老 枊瑾, 新進 李相協, 靑年政論家로 名聲놉흔 張德秀氏 等이 모히여 發刊하엿스나 元來 數字的 採算에 어두운 老士書生의 일이라 一年有餘에 10餘萬圓이 들어가고 經營은 困難하게 되엿다. 돈을 대이다가 지치인 金氏는 家用金 幾千圓을 들고 와서 『여러분! 이 돈을 내가 家用쓰는 마지막 돈을 털러 왓스니 이것을 다쓰면 나는 어쩔수 업소』라고 最後의 말까지 하엿섯다고 한다.
이때에 그의 莫逆인 安鎭禹氏는 己未事件으로 服役을 마지고 出獄하자 이 經營困難한 東亞日報社를 復興키 爲하야 東奔西走하야 畢竟 株式會社를 完成하엿다. 이리하야 幾多의 劫運을 지나며 奮鬪한 結果 이제는 光化門通에 한 4層社屋을 建築하고 朝鮮言論界의 一大權威가 되엿다. 10年을 자란 이 新聞은 風雨을 지나며 힘잇게 그 步武를 옴기인다.
京城紡績會社」
朝鮮人의 衣服次로 年 5千萬圓이 海外로 流出한다. 이에 着眠한 金氏는 大正 8年에 紡織會社를 發起하야 第1回 拂込 25萬圓으로 事業을 始作하엿다. 그러나 이것도 這間에 어떠한 事情으로 當時 企業의 責任을 마탓던 李康賢氏는 븨인 손을 털어 쥐게 되엿다. 이에 金氏는 다시 第2回 拂込을 劃策하야 50萬圓으로 現在는 年産額 220萬圓으로 氷登浦 넓은 별판에 濛濛히 그 工場煙氣를 吐하고 男女職工 450名이 일을 한다. 그 製品은 全朝鮮布木商에게 퍼지엿스며 6種의 廣木은 朝鮮人의 衣服次로 需用된다. 不遠에 第3回 拂込을 하야 明年부터는 年額 500萬圓의 産品을 내여 朝鮮總供給量이 10分의 一을 占領하리라 한다. 同時에 全朝鮮에 朝鮮人經營의 紡績會社는 이 會社 하나뿐임을 附記한다. 만일 金氏가튼 朝鮮人 財産家 10人이 잇섯드랴면 衣服次로는 朝鮮人이 外來品을 안쓰게 되엿쓸가
海東銀行
이 銀行은 원래 貴族 尹德榮 外 諸氏가 創立 經營하엿스나 中途에 經營困難에 빠진 것을 金氏의 令弟 金秊洙氏가 마튼 것이니 資本金 100萬圓의<25> 株式會社이다. 一時 失하엿던 信用도 漸次恢復하고 現在는 文尙宇氏가 釆配를 쥐고 堅實하게 經營하야 昨年도에는 6分의 配當을 하엿다 한다. 不幾年에 朝鮮財界에 相當한 地盤을 占할 것이다.
京城商工會社
이것은 並木町에 잇서 織紐 등을 經營하던 것을 金秊洙氏가 마타 經營케 되여 고무신 製造와 貿易을 經營하게 되엿다 한다.
.........................................................................................................
삼천리 제7권 제8호
1935년 09월 01일
百萬長者의 百萬圓觀
滄浪客
작고 쓰고 십다는 김성수
8월 수무닷샛날 오후의 쩔쩔끌는 해볏은 서울 桂洞 막바지 金性洙씨 洋舘住宅의 응접실을 녹일 듯이 빗최는데 나는 화초 욱어진 정원으로부터 흘너들이는 매암소리를 드러가면서 벽에 걸닌 山水畵를 처다 보왓다.
언제 보아도 방안을 이러틋 質素簡潔하게 차렷슴은 이 집 어룬의 氣風을 나타냄인 듯 조곰도 百萬長者란 어리어리한 대저택에서 늣겨지는 압박감이라고 업서서 우리들 평민으로도 마음노코 출입할 수 잇는 듯 유쾌하엿다.
조곰 뒤에 명함 전하려 드러간 계집하인의 뒤를 따라 仁村 金成洙씨가 우스면서 나타난다. 저쪽 방에서 서도 인저끼 잇슬제는 아마 나보다 몬져 차저온 先客이 잇는 듯 하엿스나 나를 몬저 맛나줌은 레포타의 時間 존중을 이해하심인가.
내가 氏를 처음 맛나든 10여 년 전이나 지금 보는 오늘이거나 氏는 언제든지 대모테 안경에 국다란 北베周依를 입엇섯다. 錦衣를 입는적 업는 이 백만장자, 금테단경을 써 본적 업는 이 백만장자, 이분의 「黃金哲學」은 엇더하엿든가, 「人生觀」또한 엇더하엿든가, 나는 第一矢를 발하여 보앗다.
나, 「이 세상에선 돈이 제일임니까, 돈우에 더 귀한 것 업고 더 갑가는 것 업다고 보심니까」
金, 「천만에요, 돈이 무에관데요, 돈가치 천한 것이 업고 돈가치 더러운 것이 업는데 무엇하자고 이 세상에서 돈이 제일 간다고 하겟서요 나는 아직 돈이 제일 간다고 생각하여 본적이 업서요, 돈 우에 인정도 잇고 의리도 잇고.....」
나, 「그러나 돈 아니면 선생인들 엇더케 은행을 경영하고, 학교와, 신문사와, 공장을 경영하겟서요, 천하에는 뜻이 백두산 가치 놉흔 이가 데글 데글 굴너다니지만 돈 한가지가 업스니까, 빈주먹만 부르들고 청천하늘을 처다보며 한숨만 짓는 이 엇더케 만은데요」
金, 「그야 그러치요 돈이란 무엇임니까, 그 자체는 조히쪽이요, 구리쇠요, 금은鑛物일 뿐 깨긋한 물건도 못되건만, 다만 이 세상에서는 사라가재도 압서는 것이 돈, 무슨 사업을 하재로 역시 돈이 압장을 서야 하게 꾸미여 젓스니까, 拜金宗도 생기고, 황금만능론자도 생 기나봅데만은 내 자신은 일즉 拜金宗의 심경을 가져본 때가 업섯슴니다. 돈 잇스면 일하고 돈 업스면 말뿐이지, 돈 때문에 노예되려고 생각을 가지고 잇지는 안어요,
黃金을 엇더케 보시는가
나, 「일전에 미국서 온 신문을 보면 록펠라는 제재산 40억 만원 중 2억 3천 만원을 사회사업에 내노으면서 聲明書를 발표하엿는데 이 세계적 大富豪의 黃金觀이란 敬聽할 만합데다그려
金, 「엇더케요」
나, 「무에라고 하엿는가 하면 내가 가진 40억만원을 나는 내 돈이라고 생각지 안노라, 다만 내 수중에 보관되어 잇는 여러분의 돈이라고 보노라 하고 또 요행 조흔 운명을 태가지고 낫기 까닭에 내가 맛터두게 되엇슬 뿐」이라고 첫곡지를 말햇습데다.
金, 「그말이 올치요, 실상 맛터잇슬 뿐이지, 제것이 다하고 고집할 맛이야 잇서야지요 돈 관리자라는 그 黃金觀에는 나도 共鳴함니다.
나, 네 그러고 그 뒤를 게속하엿는데, 「그럼 이 돈을 내가 마타가지고 잇는 것이 낭비를 피하고 압흐로 더 그 돈을 뿔굴 수 잇스니까, 내 수중에 의연히 두어야 올타고 보기에 남저지 30 몃 억만원은 아직 내어 노치 못하겟노라 하엿고, 또 今后 어느 시기에 이 돈을 내어 놋는 때문에 세상이 더 밝어질 기회가 온다면 저보다 나온 딴 사람이 그 돈을 마터 관리하게 되어도 무방하다구요.
金, 「글세오, 그러케 보는 것이 올켓지요, 그만한 자신이 업서야 엇더케 돈을 지니고 가겟습니까, 그리고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요, 세상사람은 흔히 부자라면 바버요, 멍텅구리로 아는 경향이 잇지만은, 남들이 버을지 못하는 大金을 모아 쥐는 그 當者에게는 무엔가-例하면 智力이나 體力에 잇서서 무엇인가 뛰어난 점이 잇는 법임니다. 그러킬래 몃 10 만명중 오직 그 사람에게만 돈이 가지고, 몃 100 만명중 오직 그 한사람에게만 부자소리가 가지는 것이 안여요 또 10만명이나 100만명 속에서 뽑히여지는 그 부자에게는 남이 모르는 고심이 잇담니다. 결단코, 우연히 하늘에서 금덩이가 뚝떠러저 부자가 되여지는 것은 아니지요.
나, 「네 알겟서요, 그런데 선생은 오늘까지 얼마나한 돈을 쓰섯서요, 얼마나한 돈을 자긔 손으로 만저보고 또 지출하여 보섯서요,」
이 말에 氏는 呵呵대소하면서 손을 헤헤 둘너 입을 막으란 표정을 한다.
나, 「엇재서 말슴 안하세요, 50만원임니까, 100만원임니까」
金, 「그런말 내가 엇더케 대답해요. 글세 돈 쓴 제 자랑갓해서」
나, 「웨 말슴 못하세요」
金, 「세상더러 뭇구려 하하하」
나의 이 질문은 실패인 듯 또다시
내, 「그러면 선생의 재산은 지금 얼마나 되서요, 백만원 아니 세상에서는 두분 아버지의 재산을 함처서 500만원은 넘는다 하든데요」
金, 「나 몰나요, 내가 그런걸 엇더케 알어요」
앗불사 못난 질문을 연겁허 두번이나 發하엿다가 완전히 실패를 보고 말앗다, 질문을 發하엿다가 그 대답을 엇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탐방기자로서의 낙제다, 에-덥다, 땀이나 씻고!
........................................................................................................................
2018.2.
[이런 剖棺斬屍(부관참시)] 백완기 '인촌 김성수의 삶'.. 그들이 인촌을 아는가?
정부는 지난 13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의 건국공로훈장 서훈을 취소하기로 의결했다고 한다. 그들이 인촌을 아는가?
백완기 교수가 쓴 책 '인촌 김성수의 삶'을 보면, 인촌(1891~1952)은 자기가 기획을 돕고 후원했던 3·1운동이 실패하자 국권 회복을 위해 민족 역량을 길러야 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양부와 친부를 설득해서 가산을 국가의 경제력 증진과 국민 계몽, 인재 양성에 쏟아 부었다. 조선 최초의 기업인 경성방직을 설립할 때 청년 김성수는 전국을 돌며 주주(株主)를 모집해 국민에게 산업화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깨우치려 노력했다. 동아일보를 창간해서 국민의 눈을 띄워주고 민족정기를 고취했고 중앙학원을 설립하고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의 전신)을 인수해서 민족 사학을 열었다. 뛰어난 인재들을 만나면 해외 유학을 보내 지도자로 양성했다.
<
|
위대한수령 이승만
26.04.08
조회: 41310
|
|
김성수
26.04.05
조회: 47125
|
|
»
김성수 3
김성수
26.04.05
조회: 47752
|
|
김성수
26.04.05
조회: 47869
|
|
김성수
26.04.05
조회: 47905
|

